D-H. Park Pastor

   
내용없음10
내용없음11

회원등록 비번분실
Gallery


 Holy Land image
성지 Image

 

작성자 벧엘
작성일 2013-09-11 (수) 19:27
홈페이지 http://www.bethel.kr
ㆍ추천: 0  ㆍ조회: 3926      
성지소개(터키)- 준비중 입니다.
유럽과 아시아의 교차로 위치해 있는 터키는 히타이트에서, 로마, 비잔틴제국, 오스만 대제국에 이르는 다양한 역사와 문화가 거쳐간 곳이다. 초대교회의 흔적이 남아있어 많은 성지순례객들이 터키를 찾음과 동시에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화려했던 이슬람문화가 지금까지 이어져 현재는 이슬람국가로서 자리잡았다.축구를 좋아하는 나라, 한국동란시 참전으로 맺은 인연으로 인하여, 한국인을 '코렐리'(Koreli)라고 부르며 형제의 나라라고 생각하는 멀지만 가까운 나라, 터키!! 문화만이 아니라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는 신비의 나라 터키로 떠나보자!◈수도 : 앙카라(Ankara, 260만명)◈인구 : 약 6천 785만명(2000년 기준)◈면적 : 779,452㎢ (한반도의 3.5배)◈주요도시: 이스탄불(Istanbul),이즈밀(Izmir),콘야(Konya) ◈주요민족: 터어키(Turkish,90%),쿠르드(Kurd) 및 아랍(Arab, 10%) ◈주요언어: 터어키(Turkish,90%), 쿠르드어(Kurdish) 및 아랍어(Arabic,10%) ◈종교: 전국민의 98%가 이슬람교도(수니파)이며, 그밖에 기독교, 유태교, 그리스정교 등 지리총면적은 780,5800㎢로, 유럽 대륙과 아시아 대륙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터키는 에게해, 지중해, 마르마라해, 흑해를 접하고 있다. 보스포루스 해협,마르마라해, 다르다넬스 해협을 경계로 아시아지역인 아나톨리아와 유럽지역인 트라케로 나뉘어진다. 터키는 위치에 따라 흑해, 말마라, 에게해, 지중해, 중앙 아나톨리아, 동쪽 아나톨리아, 남동 아나톨리아의 7개 지역으로 나뉜다.기후지중해 연안지방의 전형적인 온난성 기후대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터키의 독특한 지형으로 인해 변화무쌍한 기후대가 나타나곤 한다. 흑해 연안부의 따뜻한 기후를 즐길 수 있는가 하면 고산들로 가득한 산악지대에서는 연중 내내 새하얀 설경을 경험할 수 있다.사회,문화기록에 의하면 터키는 기원전 2000년, 중앙아시아 동북부에서 기원하였다고 한다. 터키의 조상은 중국 고전에 나오는 훈족으로, 중국 사람들은 기원전 220년에 수립된 터키의 테오만 야부그 왕국을 흉노라고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다.오늘날 터키 국민들은 그들의 조상이 중앙아시아 동북부에서 기원하여 서쪽으로 이동해왔다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16개 군주국이 흥망을 거듭하여 터키인들이 아나토리아 반도에 정착하게 된 것은 서기 10세기 경이라고 한다. 중세에 아랍지역을 횡단하여 서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터키인들의 대부분이 회교로 개종하였으며, 아랍문자를 도입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터키 국민들은 조상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자연 숭배사상과 풍습을 오늘날까지도 유지하고 있는데 상당부분에서 우리나라의 풍습과 근본적으로 비슷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가령 한국어와 같은 우랄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터키어는 문장 구성순서, 모음조화, 어미 활용 등에 있어서 우리나라 말과 같은 원칙을 따르고 있는 점이다.
 
종교터어키 국민의 98%는 이슬람교도(Muslim)이며, 그외 아르메니아·유태교·캐톨릭·그리스 정교 등이 있다. 터어키는 종교와 정치가 분리된 세속화된 나라로서 다른 이슬람 국가에 비해 종교적 규율 적용에는 엄격하지 않은편이다. 법률이나 사회기구가 이슬람 원리를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슬람의 전통과 관행이 매우 중요시 된다.회교 국가이나 토·일요일을 공휴일로 하는 등 서구화된 면모를 가지고 있는것이 특징적이다.풍속터어키는 종교 공휴일로서 쉐케르 바이람(Seker Bayram : Sweet Festival)과 쿠르반 바이람(Kurban Bayram : Sacrifice Festival)이 있으며, 매년 날짜가 다르다.바이람 전 한달동안은 라마단(Ramadan)으로 일출부터 일몰 시간까지 금식하는데, 가장 큰 종교 축제인 바이람 기간중에는 새옷을 입고 친척 방문 등을 하며,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카드를 보낸다. 터어키인들은 친족과 가족의 유대관계를 매우 중시하고 있으며, 가족 구성원은 가장의 권위를 존중한다.국민성터어키 국민은 오스만 제국의 영광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히 크며, 한국동란시 참전으로 맺은 인연으로 인하여, 한국인을 '코렐리'(Koreli)라고 부르고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며, 문제발생시 적극 도와주려 한다. 전통적으로 체면과 무예를 존중하며, 매우 정열적이고 다혈질이나 서두르지 않으며, 신앙의 전사(戰士)라고 불리는 가지(Gazi)의 정신을 윤리의 주요 덕목으로 생각하고 있다. 터어키인들은 민족의식이 매우 강하며, 지정학적인 특성으로 동서양의 사고방식이나 생활양식을 갖고 있다.
 
 
 
 

파묵깔레
 
파묵깔레는 석회층으로 인해 만들어진 환상적인 경관과 고대도시 히에라폴리스의 풍부한 볼거리가 절묘하게 조합된 곳이다.
 
 
 
그중에서도 파묵깔레의 석회층은 자연이 만들어 낸 경이로운 산물로, 대지 상부에서 흘러 내려온 석회 성분을 포함한 물이 오랜 시간에 걸쳐서 결정체를 만들고 이것들이 점차적으로 쌓여져서 현재의 광활하고 희귀한 경관을 만들어 낸 것이다. 딱딱해진 광활한 석회층의 패인 곳에 상부쪽에서 흘러내려온 온천수가 담겨 야외 온천을 만들기도 한다.
 
 
 
오랜 시간에 걸쳐서 만들어진 파묵깔레 석회층은 그 광활함에서 놀라고, 크림색의 종유석과 같은 신기한 모습도 발견된다. 멀리서 파묵깔레 석회층을 바라보면 목면을 뭉쳐놓은 듯 보인다. '파묵깔레'라는 지명이 터키어로 '목면의 성'의 뜻을 가진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 트로이
 
트로이 유적은 에게해에서 6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스카만드로스강과 시모이스강이 있는 평야를 내려다 보는 히살리크 언덕위에 있다. 이러한 지리학적 위치는 바다와 너무 근접하여 침입의 위협을 받지도 않으며 너무 멀지도 않아 교역의 어려움도 없기 때문에 문명이 발달하기에는 매우 적합하다. 그래서 트로이는 기원전 4000년전부터 인간이 살기 시작했다. 지금의 트로이는 호머의 일리아드로만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이 도시는 과거 여러 문명이 거쳐갔던 중요한 도시였던 것이다. 이는 독일의 백만장자이자 고고학자였던 슐리만에 의해 파해쳐진 9개층에 이르는 유적에 의해서 증명된다. 슐리만은 독일에서 목사 아들로 태어나 빈곤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어릴적 아버지가 들려주시던 일리아드 이야기를 믿으며 언젠간 꼭 트로이를 찾겠다는 신념을 다지며 자수성가 하여 중년에 이르러서는 백만장자가 된다. 돈이 모이자 슐리만은 바로 트로이를 찾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다.
 
 
 
1870년에 발굴에 들어가 슐리만은 1871년에 트로이 유적을 발견하게 된다. 3년에 걸친 발굴로 인해 슐리만은 엄청난 양의 유물을 발견한다. 그 때 보물상자도 발견하게 되는데(이 때 발견한 보물상자는 트로이보다 1000년전의 유물이다.) 이 상자에는 16000여개의 금붙이로 만든 왕관까지 있었다. 이 유물들은 슐리만이 많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독일로 가져와 그의 사후에 박물관에 기증하나 1945년 독일로 진주한 소련이 탈취하여 지금은 러시아에 있다. 초기 발굴에서 슐리만은 자신이 발견한 9개층에 달하는 유적 중 2번째 층이 트로이 유적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후에 밝혀지듯이 트로이 유적은 6번째 층이다. 밝혀진 트로이성은 일리아드에 나와 있듯이 견고하고 튼튼한 성이었다. 비록 규모가 작기는 하지만 그 당시의 무기체계로는 쉽게 공략 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성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트로이 유적들은 발굴해 본 결과 대규모 지진으로 뒤틀려 있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추론하길 트로이의 10년 전쟁은 지진으로 인한 성벽의 붕괴와 도시의 파괴에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라 한다. 트로이 목마 이야기는 지진의 신인 포세이돈을 상징하는 것이 말인 연유에서 비롯된 전설일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트로이를 받치고 있는 평야에 서서 메넬라우스 군이 되보기도 하고 트로이 성곽 위에 서서 헬렌을 차지하기 위해 10년 전쟁을 한 파리스 왕자가 되보기도 할 수 있는 트로이는 1998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트로이의 목마 전설과 트로이목마 바이러스
 
컴퓨터 바이러스중 트로이 목마라는 이름의 바이러스가 있는데 과연 트로이 목마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트로이 목마는 트로이와 그리스와의 전쟁에서 그리스가 트로이의 성밖에 만든 큰 목마이다.
 
전쟁은 두 나라사이의 비슷한 전투력과 트로이의 강력한 요새로 인해서 끝나지 않고 있었는데, 이때즈음하여 그리스는 선물이나 되는 듯 큰 목마를 성문앞에 만들고 마치 후퇴하는 것처럼 트로이를 떠난다.
 
트로이사람들은 이런 그리스의 반응을 어떻게 해석했을까?
 
목마를 만든 이유를 알기위해 점술사를 불러 물어본 결과 목마를 성안으로 들여놓으면 그리스에 재앙이 임하고 성밖에 방치해 두면 트로이에게 재앙이 임할 것이라는 해석때문에 트로이 사람들은 그리스군이 배를 철수한 후, 견고한 요새의 문을 열고 목마를 성안으로 들여놓는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그리스의 작전이었다.
 
큰 목마안에 그들의 군사를 잠입시켜두고 점술사를 매수하여 난공불락의 트로이의 성벽을 넘고자 하는 전술이었던 것이다.
 
 
 
목마를 성안으로 들여놓고 승전의 축제를 벌이고 곤히 잠든 트로이 주민들에게 목마속에 잠입해 있던 그리스 군인들이 나와 성문을 모두 열고, 후퇴하던 그리스 군사들이 모두 돌아와 결국 트로이는 점령당하고 만다.
 
 
 
마치 무슨 선물이라도 되는듯이 보이는 메일을 열어보면,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일들이 종종 있는데, 그래서 그런종류의 바이러스를 우리는 이 전설에 빗대어 트로이 목마 바이러스라고 부르게 된것이다.
 
 
 
 
 
• 쿠샤다시
 
쿠샤다시는 아이든(Aydin)시의 해안선에 있는 작은 항구의 이름이다. 쿠샤다시항이 있는 아이든 시는 예전부터 질좋은 무화과 산지로 유명했다. 고대에는 트랄레이스로 알려졌었으며 유명한 조각학교가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유적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2세기 때의 유적이다. 1186년 이후 도시는 셀주크왕조의 통치하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이 곳의 박물관에는 각 시대의 공예품이 전시되어 있다.
 
 
 
에게해의 휴양지로 유명한 쿠샤다시는 가면새의 섬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빛나는 모래사장이 아름다운 해안에 위치하고 있다. 해안을 산들이 둘러싸고 있어 계단상으로 세워진 마을에서는 아름다운 에게해가 한눈에 들어와 방문객들에게 감탄을 사고 있다. 쿠샤다시에는 수 많은 방갈로와 펜션 그리고 호텔 등이 있어 이 곳을 찾는 이들에게 편의를 제공한다. 또한 쿠샤다시는 에게해 섬들을 유람하는 크루즈의 중요 기항지로 중요한 역활을 하고 있다.
 
 
 
근처의 칼레이치 지방의 쿠쉬쇼핑 센터는 항상 활기찬 곳이어서 하루 종일 쇼핑을 즐겨도 지루하지 않다. 요트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현대적인 마리나도 있다. 쿠샤다스의 북쪽은 맑고 깨끗한 투산-쿠쉬투르 해변이 있으며 남쪽으로 23km만 가면 휴양지 규젤차므르가 있다.
 
 
 
 
 
• 콘야 (이고니온)
 
예전에 이고니온이라 불렸던 콘야는 11세기 셀주크 터키의 수도였으며 현재는 520,000명의 주민이 사는 터키 중요도시 중 하나이다.지중해로부터 250KM 흑해로부터는 500KM, 수도인 앙카라에서는 남쪽으로 250KM가 떨어진 내륙 깊숙이 위치한 도시로 해발고도가 1000M에 달해 콘야는 고원도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콘야의 경제적인 기초는 카펫과 가죽의 생산이다. 그 외에는 광물 산업정도가 있다. 콘야는 11세가 셀주크터키의 수도로 정해진 이후 크게 번성하였다. 이 때 많은 학자들과 예술가들이 콘야로 몰려들었는데 지금 남아있는 많은 역사적인 경관들은 그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메블라나 박물관과 마나레 신학교는 그 중 가장 유명한 곳이다.
 
 
 
콘야는 몇 년 전만해도 보수적인 메블라나교의 영향력으로 여자들은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도록 스카프를 써야 했다. 하지만 2002년 현재에는 스카프를 쓰지 않은 관광객들이 거리를 활보 할 정도로 개방되어 있다.
 
 
 
 
 
• 카파도키아
 
터키의 수도인 앙카라에서 남쪽으로 300K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카파도키아. 마치 동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갖갖이 버섯 모양의 기암괴석들이 드넓은 계곡지대에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물론 이 곳에서는 터키의 다른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북적거리는 시장이나 양파모양의 사원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카파도키아의 참 매력은 좀 더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다. 원뿔을 엎어 놓은 듯한 용암층 바위 속에 이 곳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삶의 터전을 마련해두고 있는 것이다.
 
 
 
수백만년전, 활화산이었던 예르지예스산(3917 m) 등에서 분출된 용암으로 인해 형성된 이 곳의 지형은 오랜 세월을 걸쳐 풍화, 침식 작용을 일으켜 부드럽고 쉽게 깍이는 습성을 지닌 응회암지대로 바뀌게 되었다. 바위를 깍아 만든 이들의 거주 공간은 덥고 건조한 기후를 피할 수 있음과 동시에 데린구유라고 불리는 지하도시와 마찬가지로 쉽게 적들에게 노출되지 않아 종교탄압시기에 기독교인들의 훌륭한 피난처가 되었다. 이러한 응회암 집의 입구는 지상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옮길 수 있는 사다리나 밧줄을 통해 올라갈 수 있게끔 되어 있다.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지형은 이 지역 거주민에게 더없는 편의를 제공하였다. 지형을 이루고 있는 응회암은 암석이라고는 하나 쉽게 깍이는 탓에 거주공간이 좁다 생각될 경우 주변의 돌을 더 파내기만 하면 되었을 뿐 아니라 돌로 만든 집은 여름에는 더위로부터, 그리고 겨울에는 한파로부터 보호해주는 역할을 충분히 하였기 때문이다.
 
 
 
지하도시를 이루고 살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버섯집 거주민들은 자신들의 거주지 이외에도 교회와 지성소, 사원들을 만들어냈다. 오늘날까지도 카파도키아에는 600개가 넘는 교회들이 보존되어 있고, 이중 최고 오래된 것은 7세기경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이들 교회를 장식하고 있는 회화들은 비잔틴 예술의 보고라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중요한 유산이다.
 
 
 
• 차낙칼레
 
차낙칼레는 인구 5만 5천명의 소도시지만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며 에게해(Aegean sea)에서 마르마라해(Marmara sea)로 들어오는 다르다넬스 해협(St.Dardanelles)의 입구에 있어 교통의 요충지이다. 해협의 아시아쪽과 유럽쪽까지의 해협의 넓이는 고작 1200m 밖에 되지 않는다. 이 작은 해협을 사이에 두고 유럽과 아시아가 갈라지는 것이다.하지만 차낙칼레시의 행정구역은 이 해협을 사이에 두고 유럽쪽과 아시아쪽 모두 포함하고 있다.
 
 
 
다르다넬스 해협은 과거 헬레스폰투스(Hellespontus)라고 불리웠다. 이 그리스어의 뜻은 "그리스의 문호"라는 뜻이다. 이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이 해협은 그리스와 흑해연안의 식민지들을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로 상업,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이 해협의 중요성은 근대에 들어서도 마찬가지여서 많은 나라들이 이 해협을 둘러싸고 다툼을 벌였다. 그래서 이 해협은 1841년 맺은 런던조약에 의해서 모든 나라의 상선들이 이용할 수 있는 자유해협이 되었다.
 
 
 
1451년 술탄 마호멧 2세(Sultan Mehmet II) 이후 이스탄불의 지배자들은 다르다넬리해협의 유럽쪽에 Kilitbahir 요새를 건설했다. 그리고 그 반대쪽에는 Cimenlik 요새를 지어 이 해협을 통과하는 모든 배들을 통제했다. 현재 Cimenlik 요새는 차낙칼레 전쟁의 군사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에게해와 흑해 그리고 아시아와 유럽을 잇거나 나누고 있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이 지역은 과거에 2개의 중요한 전쟁을 치렀다. 첫번째는 호머(Homer)의 일리아드로 유명한 트로이(Troy/ 현재명:Truva ) 전쟁이다. 이 불멸의 이야기는 트로이가 발굴되면서 허구가 아닌 실제 있었던 이야기로 밝혀졌다. 두번째 전쟁은 차낙칼레 전쟁(Canakkale Battle)이다. 이 전쟁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urk)의 지휘 하에 터키군이 차낙칼레를 지키기 위해서 벌였던 1차 세계대전 기간에 일어난 전쟁이다. 그래서 전투가 벌어졌던 차낙칼레의 유럽쪽 지역인 갈리폴리(Gallipoli)는 국립공원이 되었으며 이 곳 언덕에 거대한 석조기념비가 세워져 차낙칼레 전투에서 전사한 50만명의 군인들을 기리고 있다.
 
 
 
다르다넬스 해협의 유럽쪽에서 아시아쪽으로 매일 수 차례 왕복하는 페리에는 언제나 승객들과 차들로 가득하다. 해협을 항해하는 요트는 아름다운 차낙칼레의 경관을 감상하기 위해서 잠시 이 곳에 정지한다. 그러면 관광객들은 호텔과 레스토랑 그리고 카페들 사이의 산책로를 산책하며 Kilitbahir요새에서의 경관과 차낙칼레 고고학 박물관 그리고 차낙칼레 항구 등을 보며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
 
 
 
 
 
• 이즈미르
 
호머의 고향이기도 한 이즈미르는 "에게해의 진주, 아시아의 사랑, 아시아의 꽃, 아시아의 면류관"이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이다. 과거에는 로마황제를 찬양하기 위해 최초로 황제신전을 세우기도 했던 로마에 대한 충성심이 유달리 높았던 도시였다. 현재 터키의 3대 도시 중 하나이기도 한 이 도시는 터키에서 두번째 가는 항구도시이기도 하다.
 
 
 
이 아름다운 항구도시는 부드럽게 휘어지는 해변을 따라 잘 정돈된 도로들과 푸른 공원들이 늘어서 있어 그 정취가 각별하다. 온화한 기후에 많은 고급 호텔들이 있으며 상업과 산업이 발달되어 있다. 에게해의 아름다운 풍광을 가장 잘 살린 도시인 것이다. 에게해의 맑은 바닷물이 곱개 포개지는 끝없는 해안선은 올리브 나무숲과 기암괴석 그리고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원시해변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이 해변은 사람들에게 목가적인 낚시터이자 고대문명의 잔존처 그리고 매혹적인 집회장소로 사랑받고 있다.<사진제공 : 터키정부 관광청>
 
 
 
 
 
• 이스탄불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가 되는 보스포러스 해협을 끼고 위치한 이스탄불은 2000년이 훨씬 넘는 그 역사에 걸맞게 아주 자연스럽게 동서양 문화와 상업의 교류지로서 역할을 다하여 왔다.
 
 
 
세계를 지배한 3대강국인 로마, 비잔틴, 오스만제국의 수도이기도 했었던 이 곳은 오늘날까지도 도시 곳곳에 과거 번영의 흔적들을 보존해놓고 있음으로서 생생한 역사의 장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1200만명의 인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도시로서의 면모도 동시에 내포하고 있고, 또한 서양과 동양의 절묘한 조화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아주 묘한 신비가 깃들어 있는 도시라고 하겠다.
 
 
 
이스탄불이 세계적인 국제 도시로 발달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정학적 위치때문인데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가 바로 보스포러스 해협이기 때문이다. 보스포러스 해협은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 정치,경제적으로 중요한 해협으로 흑해의 자원들이 서방으로 나가는 경제적 지름길이다.
 
 
 
지리적으로 보스포러스 해협을 두고 유럽과 아시아로 나눠지기때문에 이스탄불은 유럽과 아시아가 공존하는 유일한 도시라고 할 수 있다.
 
보스포러스 해협을 두고 동쪽의 아시아 지역은 대부분 주거지역이 되고 서쪽의 유럽지역은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가 된다.
 
유적지가 모여있는 곳은 구시가지인 술탄 아흐멧 지역은 유럽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지역에는 로마/비잔틴/오스만 제국의 궁전과 교회가 모여있고 모두 이지역에 몰려있다.
 
 
 
 
 
• 에페소
 
에페소는 기원전 1500-1000년 사이에 처음 세워졌다고 알려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아테네 왕자 안드로클로스(Androklos)의 지휘하에 그리스의 이주민들이 아나톨리아에 처음 정착하게 되었는데 그때 그가 현인들에게 그들의 새도시가 어디에 세워질 것인가에 대해 물었다고 한다. 현인들이 예언하기를 야생 멧돼지 한마리와 물고기 한마리가 그들을 새도시로 이끌것이라고 했다. 어느날 야외에서 안드로클로스가 생선을 굽다 그 중 한마리가 팬에서 미끄러져 가까운 숲속으로 떨어졌고 이와함께 튄 불똥이 숲에 번지자 사나운 멧돼지 한마리가 불을 피해 뛰쳐나왔다. 예언자들의 말을 기억한 안드로클로스는 도망치는 멧돼지를 쫓아 죽이고 바로 그 자리, 즉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서쪽으로 1200미터 떨어진 고대 에페소가 있던 곳에 그들의 새도시를 세웠다. 기원전 7세기, 에페소는 키메르(Cimmerian)인에 의해 아르테미스 신전을 포함하여 완전히 파괴되었고 이후 이곳은 그리스의 참주들에 의해 다스려졌다.
 
 
 
기원전 6세기경 에페소는 리디아왕국의 군주 크로이소스(Croesus)의 지배를 잠시 받긴 하였으나 곧 페르시아에 정복되었고 다시 알렉산더 대왕의 손으로 넘어갔다. 아나톨리아 지방을 지나가던 알렉산더 대왕은 크로이소스에 의해 재건된 아르테미스 신전의 아름다움에 빠져 이 곳을 정복, 에페소는 평온을 되찾고 융성해지기 시작했다. 이후 리시마쿠스(Lysimachos)는 피온산(Mt.Pion)과 코레쏘스산(Mt.Koressos) 중간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이 곳을 높이 10미터, 총 길이 9Km의 성벽으로 요새화시켰다.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원형극장, 경기장과 체육관 등의 유적은 이 당시 지어진 것이다.
 
 
 
기원전 88년, 에페소인들은 폰터스(Pontus)와 연합하여 로마인들에게 대항하였으나 로마의 세력 팽창이 엄청날 것을 알아차린 에페소인들은 곧 로마편으로 돌아섰다. 이로써 에페소는 로마의 동맹국이 되었을 뿐 아니라 로마제국 아시아속주의 수도로 부상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곳은 거대 항구가 있는 아시아 무역항로의 종착지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번영도 서기 17년에 일어났던 대지진으로 한순간에 무너져 폐허로 변하였다.
 
 
 
교회 역사에서 에페소는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제자 사도 요한과 관련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사도요한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바울로 인해 복음이 왕성히 전해지고 있다는 에페소로 오게 되었다. 에페소에 도착한 요한과 마리아를 위하여 에페소 성도들은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이후 바오로 2세가 성모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여 신성하고 중요한 곳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이 곳은 카톨릭교회의 성지로 지정되었다.
 
 
 
 
 
• 앙카라
 
중앙 아나톨리아의 심장부에 위치하고 있는 앙카라는 터키의 수도이다.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술탄제를 폐지하고 터키 공화국을 세운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urk)는 전까지 터키의 수도였던 이스탄불을 제치고 앙카라를 수도로 정한다.
 
 
 
앙카라의 주위에는 청동기 시대의 유적과 히타이트(Hatti)문명의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B.C 2000년경 앙카라의 주인은 히타이트인들이었다. 그 뒤로 이 곳은 프리지아인(Phrygian)과 리디아인(Lydian) 그리고 페르시아인(Persian)들로 차례로 주인을 바꾸어 갔다. 그러다 B.C 3세기에 와서 갈라디아 사람들이(Galatian) 이 곳을 그들의 수도로 정한다.
 
 
 
그 때 앙카라는 앙키라(Ancyra)라고 불리웠다.앙키라의 뜻은 닻이다. 이 앙키라는 그 후 로마인들과 로마인 이후에는 비잔틴인들에게 지배당하였다. 그러다 1079년 셀주크 투르크가 앙키라를 점령하였으며 그 후 이 곳은 1402년까지 약 3세기동안 셀쥬크 투르크에 의해 지배된다. 그 후 오트만 사람들에 의해 세워진 오스만투르크가 지배하게 된다. 이 지배는 독일편에 서서 1차세계대전을 치루어 국가의 독립이 위태로워진 상황에서 1922년 11월 케말 아타튀르크가 술탄제를 없애고 공화국을 세울때까지 지속된다. 케말 아타튀르크는 1923년 10월 13일에 앙카라를 새로운 터키공화국(Republic of Turkey)의 수도로 선포한다. 이 도시는 이 때부터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신 시가지와 수 천년 동안 시가지를 이루었던 구 시가지로 나뉘어진다. 이 신 시가지에 케말 아타튀르크의 묘가 있다. 이 묘는 10년동안의 공정기간이 걸려 석회암으로 만들어진 장려한 묘이다.
 
 
 
구 시가지는 성채로 둘러싸여 있다. 성벽 내부에 있는 12세기에 지어진 Alaeddin Mosque은 셀쥬크식 목공예의 진수를 보여준다. 이 것은 오스만투르크 시대에 다시 지어진 것이다. 구 시가지 내에는 많은 전통 터키가옥들이 남아 있다. 몇몇은 아트 갤러리나 멋진 레스토랑등으로 쓰이고 있어서 앙카라의 변화를 느끼게 한다. 아름답게 재 단장한 예전의 바자르는 앙카라의 성채로 들어가는 문 근처에 있다. 이 건물은 현재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으며 로마,푸리지아,히타이트 그리고 구석기 시대까지의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한 유물들을 보관하고 있다. 이 박물관은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문을 연다.
 
 
 
 
 
앗소
 
고대도시 앗소는 현재는 터키국의 작은 항구도시로 남아있지만 고대에는 소아시아지역의 예술적 커뮤니티의 중심이었다. 앗소는 차나칼레에서 87km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앗소에서 3년 이상 교육에 힘을 쏟았다. 그는 앗소에서 앗소의 지배자이자 그를 앗소로 부른 헤르메니아의 조카딸과 결혼하여 철학학교를 설립하고 동물학,생물학과 식물학에 관한 연구를 실시했다. 그의 교육과 연구는 마케도니아의 왕이었던 필립스의 부름이 있기까지 3년이상 이어졌다. 그리고 사도 바울 또한 제 3차 선교여행길에 쉬운 뱃길을 버리고 드로아에서 육로로 앗소까지 와 이 곳에서 배를 타고 미둘레네로 갔다고 성경은 전한다.
 
 
 
앗소는 2가지의 유명한 유적을 가지고 있다. 그 중 하나인 앗소의 성채는 비잔틴시대에 지어졌다.그리고 남은 하나인 아테나 신전은 언덕위에 있어 에게해를 내려다 보고 있는 환상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소아시아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도리스식 건축양식으로 매우 유명하다.아테나 신전을 중심으로 아고라와 체육관 극장이 바다를 내려다 보는 위치에 위치하고 있다. 아테나 사원의 북쪽에는 14세기 이 곳을 지배했던 오트만제국의 술탄 무라트강이 건설한 회교사원이 있다.이러한 유적들은 1881-1883년사이에 처음으로 발굴이 시작되었다. 이 때 발견한 유물들은 루브르 박물관과 보스턴의 박물관에 보내졌으며 얼마 후에는 이스탄불의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안타키아(안디옥)
 
안타키아(Antakya)는 예전 지명인 안디옥(Antioch)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이 도시는 터키의 최남부 이스켄데런 만(Iskenderun Bay) 근처에 있으며 시리아와의 국경에 근접해 있다. 과거에 이 도시는 로마의 속주였던 시리아의 수도였다. 인구도 많았으며 실크로드에 있어 상업적으로 중요도시였다. 하지만 현재는 1939년 부터 남부 터키의 Hatay지방의 중요도시가 되었다. 근처에 Orontes River (터키명 : Asi Nehri)가 있다. 이 유서깊은 도시는 B.C. 301년에 알렉산더 대왕의 대장 중 한 사람이었던 Seleucus Nicator에 의해 세워졌다. 그는 그의 아버지의 이름 Antiochus를 도시이름으로 했다.
 
 
 
이 고대도시는 기독교의 역사상 매우 중요한 도시였다. A.D. 33년에 많은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안디옥으로 갔다. 이 때의 전도사에서 "Christian"이란 말이 처음 사용되었다. 초기의 전도활동은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나 안디옥에서는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함께 신앙생활을 했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 시대의 안디옥은 그리스어를 하는 기독교 공동체가 있었다. 안디옥의 크리스찬 공동체는 예루살렘만큼 보수적이지 않았었던 것이다. 그래서 안디옥에서는 예루살렘보다 오히려 교세가 더 뻗어갔다.
 
 
 
이 도시는 로마의 속주로 계속 발전하다 B.C 6세기경 대지진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한다. 그 후 아랍인들에게 흡수되어 작은 도시로 전락한 후 A.D 10세기경 비잔틴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 후에는 A.D 1084에 셀주크 투루크에 의해 지배된다. 그것을 1098년 십자군이 탈환하였으며 1268년에는 이집트의 맘룩(Mamluks)이 지배하였다. 그러다 16세기에 오토만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가 제 1차 세계대전때까지 오토만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안딸랴
 
안딸랴(Antalya)의 옛날 이름인 Attaleia는 B.C.150년에 팜필리아 해안에 도시를 세운 페르가멘의 왕 Attalos 2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과거의 신비로움을 불러일으키는 안딸랴 지방은 터키에서도 경치좋기로 유명한 곳으로 고고학적이고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이다. 안딸랴는 바다, 태양, 역사, 자연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지중해에서 가장 아름답고 깨끗한 해안을 볼 수 있다. 터키 남부에 위치한 이 도시는 터키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으로 자연미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지금도 신과 여신이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신비로운 도시이다.
 
 
 
안딸랴는 지중해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대에 이 곳은 '모든 종족의 땅'이란 의미의 팜필리아 지역에 걸쳐 있었다. 이 곳은 그 이름처럼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많은 민족이 거쳐간 도시이다.
 
BC 1세기에 페르가뭄의 왕 아딸루스는 신하들에게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발견할 것을 명령했고 그는 지상의 파라다이스를 원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전세계를 다 뒤진 후에 그들은 이 곳을 발견했고 여기가 천국임에 틀림없다고 전했으며 아딸루스 왕은 이 곳을 Attaleia라 이름지었다. 그 후로 많은 나라들이 이 곳을 주목했는데 로마인들이 페르가멘 왕국을 지배하게 되고 AD 13세기에 로마황제 하드리안(Hadrian)이 이 곳에 다녀가면서 Attaleia는 로마 도시중에서도 알려지게 되었다. 이 곳에는 그를 기리기 위해 지은 아치가 지금까지 남아 있기도 하다. 셀주크 투르크가 1207년 안딸랴를 지배하게 되었을 때 이 도시는 아달랴(Adalya)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려졌고 오토만 또한 셀주크의 명칭을 따랐다. 이 곳이 터키 공화국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중요한 항구 도시가 되었다. 안딸랴는 1960년 이래로 빠르게 성장하였고 199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1,146,109 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열대 지중해 기후로 여름에는 고온건조하며 겨울에는 비가 많이 내린다. 4월에서 10월에는 따사로운 태양이 내려쬐고 겨울에도 온화한 날씨를 보인다. 습도는 64%로 약간 높은 편이고 평균기온은 21.5 °C이다. 안딸랴의 여름은 8~9달가량 계속되며 천상의 날씨를 보인다.
 
 
 
 
 
사프란볼루
 
터키의 옛삶과 옛삶의 공간을 들여다 볼 수 있는 한국의 민속촌과 같은 곳으로 전통가옥이 고스란히 살아 숨쉬고 있는 곳이다. 이스탄불에서 흑해방향을 향해 출발하는 버스를 이용할 경우 6시간 정도가 걸린다.
 
 
 
이 도시가 '사프란'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이곳에서 자라는 꽃이름 사프란에서 연유한 것이다. 사프란 꽃은 천연염료와 향료로 쓰인다.
 
 
 
이 마을의 전통가옥들은 터키 오토만 목조 가옥이 대부분인데 지진이 잦았던 터키에서 아직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는 점이 놀랍기도 하고 당시의 건축기술이 뛰어났다는 점도 느끼게 된다. 그래서인지 이곳 사프란볼루를 가장 많이 찾은 여행객들이 바로 일본인들이었다고 한다. 사프란볼루의 가옥들과 그 거리풍경들은 옛날 일본의 시골풍경과 너무나 유사했기 때문이다.
 
 
 
사프란볼루를 자유여행 또는 배낭여행으로 오는 관광객들은 오랜 세월을 거쳐온 이곳의 하맘(터키식 공중 목욕탕)에 들러 목욕을 해보는 경험을 추천한다.
 
 
 
 
 
부루사
 
부루사는 인구 160만명의 마드마라해에 남서쪽에 위치한 터키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이다. 올림포스 산(Mt. Olympos of Mysia, 2443 meters)의 낮은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부루사란 도시명은 비티니아(Bithynia)의 왕이었던 Prusias의 이름에서 파생된 것이다. 부루사에 대한 비티니안의 지배는 B.C 74년 비티니아의 마지막 왕이었던 니코메데스 4세가 왕권을 로마에 넘겨줄 때까지 계속된다. 그 후 1326년 오스만투루크제국의 첫번째 수도가 된다. 그래서 아직도 이 도시에는 중요한 오스만투르크식 건물이 많이 남아 있다.
 
 
 
푸른 부르사라 불리는 이 도시는 초록의 평야에 위치하여 공원과 정원으로 도시가 가득 차 있다. 이 도시는 과수업이 중요한 산업이다. 부르사는 아직껏 실크산업과 타월산업에 있어 명성을 얻고 있다. 부르사에서 유명하고 맛있는 음식으로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 Iskender Kebab, 접시빵, 토마토 소스, 그릴로 길죽하게 구운 고기, 녹인 버터와 요그르트 그리고 설탕으로 조리한 밤이 매우 유명하다.
 
 
 
이 도시를 여행하길 원한다면 도시의 동쪽구역에 있는 Yesil Turbe(Green Mausoleum)부터 보아야 한다. 정원이 있는 이 녹색의 장려한 묘는 내부가 푸른타일로 만들어져 있다. 술탄 모하멧 1세(Sultan Mehmet I)를 기리는 이 묘에는 푸른 타일로 뒤덮힌 기념비와 그의 관이 있다.
 
 
 
 
 
 
 
보드룸
 
에게해와 지중해가 교차하는 눈부실 정도로 푸른 해변, 보드룸에는 기사 로드스가 세운 중세의 성곽이 상징적인 모습으로 입구를 호위하고 있다. 이 마을은 온갖 매력이 넘치기 때문에 언제나 관광객으로 붐비며 야자나무가 있는 해안선을 산보하는 관광객의 모습이 많이 눈에 띄며 마리나도 호화로운 요트로 들끓고 있다. 마을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맑고 투명한 바다가 있어 파도 속에서 따듯하게 수영을 즐길 수 있다. 잠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수 없이 많은 암초와 가로로 된 동굴을 탐색하기도 하고 바위가 만들어 낸 장엄한 해저의 모습도 관찰 할 수 있다. 형형색색의 해면이나 문어 외에도 생각할 수 없을 만큼의 해산물을 딸 수 있다. 보드룸의 보트에 관한 이야기는 고대에도 이미 알려져 있었다. 지금도 장인이 뱃머리와 뱃꼬리 부분이 뽀죡한 티르한딜과 배의 폭이 넓고 뱃꼬리에 둥굴게 띠를 두른 굴레트라는 전통적인 요트를 제작하고 있다.특히 글레트는 유람선과 레저용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매년 10월에 행해지는 경주에도 사용되고 있다.
 
보드룸이 관광지로서 인기를 얻기 전에 방문했었던 관광객들이 가게를 활기에 넘치게 했다. 흰 벽으로 둘러싸인 좁은 길에 늘어서 있는 작은 가게에는 각종 피혁제품, 자연해면, 파란 유리 구슬이 누군가가 찾아 주기를 원하는 듯 각종 토산품들과 함께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 부틱에는 부드러운 면소재의 의상 이외에도 키림나 융탄자, 샌달, 자수 등이 있다. 보드룸에는 생동감 있고 친숙하며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있으며, 몇몇 군데의 작은 갤러리가 있다는 점에서 터어키 예술 커뮤니티의 중심지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커뮤니티에 의해 보드룸은 더욱 더 형식에 얽메이지 않고 밤을 즐겁게 지내려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보드룸의 밤은 좋아하는 레스토랑에서 천천히 신선한 에게해의 해산물요리를 즐겨 볼 수 있는 낭만이 있다. 그 후에 나이트클럽이나 화려한 디스코장에서 새벽까지 놀 수 있다.
 
고대 할리카르나소스, 보드룸은 헤레도투스의 탄생지이며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이의 하나로서 손꼽히는 마우솔후스왕의 묘(기원전 4세기)가 있다. 항구에는 15세기 십자군 건축양식인 세인트 페텔로 중세 성곽, 보드룸 성곽이 있다. 이 성곽은 해저 고고학 박물관으로 개조되었으며 아주 오래된 청동기 시대의 유산을 전시하고 있다. 괴크테페에서 보이는 멋진 경치는 박물관 내에 있는 2세기 극장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사진 촬영 장소가 되고 있다.
 
 
 
 
 
베르가모 (버가모)
 
베르가모는 높은곳이라는 뜻에 맞게 에게해에서 24km 내륙으로 들어온 곳에 해발 300m 이상의 고원에 위치한 도시이다. 베르가모는 과거에 페르가문으로 불리웠다. 이 도시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시기는 알렉산더 대왕의 아시아 원정 때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 이후에 그의 대장 중 하나였던 리시마쿠스(Lysimachus)가 페르가문이 천연의 요새임을 알고 산의 정상에 성채를 세우고 아크로폴리스를 차례로 만들어 나간다. 그 후 페르가문은 리시마쿠스의 사후에 독립국가가 된다.
 
 
 
페르가문은 에우메네스 2세의 제위기간이었던 BC 197~160년 사이에 최대의 전성기를 맞는다. 이 시기에 세계 최대의 도서관이 세워지는데 무려 20만권의 도서가 있었으며 이를 경계한 이집트에서는 페르가문에 파피루스의 수출을 금지할 정도였다고 한다. 소아시아에서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이 된 페르가문은 높은 문화수준을 구가하며 그 시대 최고의 도시로 불리었던 알렉산드리아에 비견되었다. 페르가문은 알렉산드리아의 문화와 조각술,건축양식 등을 받아들여 훌륭한 공공건물들과 유명한 학교 그리고 넓이 30㎡ 높이 12㎡에 이르는 거대한 제단이 있는 제우스신전을 주축으로 디오니소스,아스클레피오스,아테네등 4대 신전 등을 만든다.
 
 
 
BC 4세기에 세워진 아스클레피움은 세계최초로 정신치료를 실시할 정도로 소아시아에서 있어 최고의 의학중심지였다. BC 4세기에서 AD 세기까지 번성한 이 병원은 대지진으로 파괴되었으며 아직도 유적이 남아 있다.
 
 
 
이렇듯 문화도시로서 번성해 가던 페르가문은 아탈로스 3세에 이르러 그의 유언에 의해 왕국을 로마에 양여하여(BC 133) 그 후 페르가문은 로마의 소아시아 속주로서 번영을 하게 된다. 로마시대에는 로마황제를 숭배하는 신전이 세워지고 황제숭배의 기치를 세워 기독교세력과 많은 충돌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박해를 받으며 세워진 베르가모 교회는 오히려 신앙의 순결을 지킬 수 있었으나, AD 313년 콘스탄틴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내려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면서 세속화되기에 이른다. 이에 아시아의 7대 교회 중의 하나인 베르가모 교회는 하나님에게 세속화에 대한 경고를 듣게 된다. 하지만 베르가모 교회는 많은 유혹과 핍박에 일부 영향을 받으나 그 종교적 정절을 지켜 현대에 이르기까지 본받고 경고로 삼을 교회로 칭송받고 있다.이렇게 번영했던 페르가문은 716년 아랍의 침입으로 쇠퇴하기 시작해서 현재는 인구 5만의 작은 소도시로 전락했지만 1878년 독일의 토목기사 칼 휴만(Karl Human)에 의해 철도부설 공사 중 유적이 발견되어 그 웅장했던 과거를 드러내게 되었다. 지금 베르가모라 불리는 페르가문은 지난 100년 동안 발굴작업이 진행되었지만 앞으로 발굴할 것들이 더 많이 남아 있을 정도로 대규모의 유적지이다. 하지만 발굴 초기에 많은 유물들을 독일에서 가져가 현재 제우스의 거대한 제단을 비롯해 많은 유물들이 독일의 페르가몬 박물관에 있다.
 
현재의 베르가모는 과거와는 달리 언덕위가 아닌 언덕아래에 자리잡고 있으며 도시에서 아스클레피온까지는 2km, 아크로폴리스까지는 6km정도 떨어져 있다.
 
 
 
 
 
데니즐니
 
인구 24만의 중소도시인 데니즐리는 북동쪽으로 19km 떨어진 인근에 유명한 온천 휴양지인 파묵깔레가 있어 연계 관광도시로서 중요하다.
 
 
 
데니즐리는 뷔윅 멘데레스(메안데르)강 근처에 있으며 높은 산들에 의해 파묻혀 있다. 신록이 우거진 계곡이 가져다 주는 풍요로운 자연 환경은 이 도시의 문화와 역사 또한 풍부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이 도시 최초의 주민은 루비아인이었지만 몇 세기가 지나서는 히타이트인이 살기 시작했다. 이 비옥한 토지는 몇 세기에 걸쳐 프리기아, 리디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로마, 비잔틴, 셀주크, 오스만 등 수 많은 문명을 지탱해 왔다. 현재 데니즐리는 넓은 도로에 공원과 호텔이 잘 정리된 도시이다. 시 중앙에 있는 아타튀르크 민족학 박물관에는 민예품과 공예품이 전시되어 있다. 쇼핑을 즐기기에 좋은 칼레이치 차르쉬스에는 토산품으로 구리제품과 보석, 타올, 실크브라우스가 있다. 참르크 공원과 인지리프나르 공원, 괴크프나르 공원에서는 피크닉도 즐길 수 있으며 소나무 숲 그늘을 산보해 보는 것도 좋다. 기분 좋은 샘물과 온천도 인기를 모으로 있다.
 
 
 
<텍스트 및 사진 자료 제공 : 터키관광청>
 
 
  0
3500
번호     글 제 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41 성전으로 들어가는 홀다 문 입구의 석비의 모형(이방인 출입금지.. bethel 2016-07-10 3033
40 성전으로 올라가는 계단 bethel 2016-07-10 2771
39 솔로몬 행각 bethel 2016-07-10 2625
38 헤롯 성전과 성전산의 모습을 재현한 모형(이스라엘 박물관) bethel 2016-07-10 5408
37 물저장고 bethel 2015-03-13 3038
36 포도주 틀(wine press) bethel 2015-03-13 4659
35 정원 무덤(Garden Tomb) bethel 2015-03-13 3033
34 정원 무덤(Garden Tomb) bethel 2015-03-13 3536
33 성지소개(이탈리아) - 준비중 입니다. 벧엘 2013-09-11 3921
32 성지소개(요르단) - 준비중 입니다. 벧엘 2013-09-11 3842
31 성지소개(시리아) - 준비중 입니다. 벧엘 2013-09-11 3198
30 성지소개(레바논) - 준비중 입니다. 벧엘 2013-09-11 3146
29 성지소개(이집트) - 준비중 입니다. 벧엘 2013-09-11 3492
28 성지소개(터키)- 준비중 입니다. 벧엘 2013-09-11 3926
27 카파도키아(괴뢰매) bethel 5298
26 갈멜산- 준비중 입니다. bethel 3947
123

Copyright 2007-2023 by Bethel Church., All right reserved.
대표전화 : 1588-0342 / Fax : 0505-008-1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