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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eth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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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_쿰란(Qumran)에서- 준비중 입니다.

 

쿰 란

 

       

Ⅰ. 서 론

 

6.25 한국 전쟁 이후 이산가족을 찾은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자신이 태어난 고향 땅을 가보고 싶어 했다. 귀로만 들고 마음으로만 그리워하던 그 땅을 직접 밟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회복하고 찾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기독교인들은 믿음의 고향인 성지(holy land)에 대한 애틋함이 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 삼은 출애굽의 역사의 현장인 이집트와 요르단 그리고 이스라엘뿐 아니라 바울이 복음을 전한 터어키 소아시아 일대와 시리아와 레바논 지역은 현지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역사적 신앙적으로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큰 의미가 있다.

AD 70년 로마가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뒤에 세계 각지로 흩어진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성지순례는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성지의 역사를 믿음의 눈으로 살펴보는 것이다. 성지의 역사는 사건으로서 역사인 동시에 믿음의 역사이다. 믿음의 역사는 기나긴 과거에서 끝나는 역사가 아니고 오늘도 살아 숨쉬는 역사이다. 그것은 역사가 단순한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객관적인 평가이기 때문이며 이러한 성서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서 전체 지리와 풍토 그리고 고고학적인 자료들에 대한 올바른 연구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

 

21세기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이 말씀을 전할 때 얼마나 올바르게 성경을 이해하고 있을 까? 미국사람이 한국의 역사를 단순히 지식적으로 전하려 할 때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문서연구를 위해서는 현지를 탐방해서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절차들도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기독교인들이 성서고고학자나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우리가 얼마나 많은 편견과 오류 속에서 성서를 이해하고 있는지 성지 순례를 다녀오면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과거 성지의 역사를 둘러보는 것과 함께 오늘 자신의 마음속에 숨쉬는 성령의

영감과 능력을 아울러 경험해야 한다. 우리의 최종적인 본향은 예수의 과거가 담긴 성지가

아니고 예수가 현재 거하고 미래에 다스리실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역사를 기억하는 민족이다 과거에 불행했던 이집트의 노예 생활 출애굽을 통한 구원의 사건들 죄에 빠졌던 일들 바벨론 포로 시절 은총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과 경험 등 성경에는 기억하라는 구절이 많이 나온다. 그런데 이처럼 중요한 성지의 역 사에서 암흑기로 그 역사가 성경에 기록되어져 있지 않은 신구약 중간사를 우리는 기억저편에 제외시켜두고 있었다. 신구약 중간사의 부재는 묵시문서와 계시록 등 종말론적 성서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해석을 가져왔고 우리나라에도 시한부 종말론을 비롯하여 휴거 다미 선교회 등 사회적인 문제로까지 이어졌다. 희랍 시대 동안 유다의 종교적 공동체는 인근 국가들의 이교주의에 대해 활발히 반발하였다. 모세의 율법을 가르치는 교사들로서 서기관들이 임명되었으며 주전 2세기경에는 또 다른 분리주의 자들이 집단인 바리새인들이 사두개인들의 정치적 및 종교적 지도권에 도전하였다.

세겜에서는 사마리아인들과는 별도로 번성 하였으며 모세의 전승의 독특한 강조점들을 그대로 보전하기 위한 시도로서 다른 종교적 집단들이 유대교의 주류로부터 파생되어 나왔다. 이런 공동체들 가운데서 사해 북서쪽에서 생겨난 한 공동체는 오늘 날에 와서 가장 중요한 고고학적 자료들을 제공해 주었는데 그곳이 바로 쿰란이다. 예루살렘에서 사해 바다로 가는 길에서 볼 수 있는 곳은 베다니 세례요한의 집 여리고 시험 산 요단강 사해 쿰란 엔게디 마사다 등이 있다. 그 중에서 이번 성지 순례 중 우리가 순례한 곳은 쿰란인데 신구약 중간사와 구약성서의 이해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사해사본이 발견된 쿰란은 성서고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 성지로서 성지순례 기간 동안 필자가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았던 장소이다.

이 보고서를 통하여 쿰란의 역사적 배경과 지리를 살펴보면서 신구약 중간사의 이해 그리고 쿰란유적지를 발견하게 된 배경과 유적물들 가운데 쿰란 문서의 중요성과 그 내용을 살펴보고 신약성서와의 관계 그리고 구약성서의 정경화에 대한 자료로서의 쿰란문서의 중요함을 다룰 것이다 또한 이 문서와 유적의 주인공들인 쿰란 공동체에 관하여 기존의 서적들을 통해 살펴보면서 그들의 자기 정체성과 이 공동체가 초대교회에 미친 영향력을 공부할 수 있을 것이다.

 

 

Ⅱ. 쿰란의 역사와 지리적 배경

 

1. 역사적 배경( 신구약 중간사 )

유다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삶의 터전을 잃고 바벨론과 페르시아를 거쳐 헬라 로마로 이어지는 열강들의 지배를 겪으면서 과거의 전통과 새로운 사조들과의 충돌 및 갈등을 통하여 다양하고 복잡한 사상을 낳았다. 일한 역사적 배경은 이스라엘의 새로운 종교와 전통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흔히 이 기간을 신구약 중간기라 부르게 된다. 이 기간은 이스라엘백성이 바벨론의 포로생활을 거쳐 본토로 귀향하게 된 후 그로 이하여 발생한 사회 구조 및 사상 체계의 변화 그리고 헬라 로마로 이어지는 새로운 지배체제와 헬레니즘과의 충돌로 인하여 발생한 문화적 변화 나아가 예루살렘의 멸망 등 약 400년간의 과정에서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 기간이다. 이 기간은 구약의 말라기에서 신약의 마태복음에 이르는 공백기간으로 침묵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당시에는 예언을 하거나 말씀을 기록할 선지자가 없었기 때문에 성서에 기록이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관한 역사적이 사실은 세계사에 분명히 남아있다. 또한 쿰란의사본과 그 유적들이 중간시대의 좋은 자료가 되어준다.

분열왕국 시대 이후 이스라엘 중간 시대를 개관해 보면 그리스 제국과 알렉산더의 원정 (헬레니즘시대 주전 359-323 년경), 프톨레미와 인티오쿠스 3세의 팔레스타인 지배(주전 320-200 년경) 유다의 마카비 반란과 독립 쟁취 (주전 167-134 년경), 그리고 하스몬 왕조와 로마의 지배 시작인 주전 142-63년경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이 소수 전투에서(333B.C.) 승리하여 지중해의 패권을 잡은 뒤 팔레스타인에 헬라문화가 불어 닥치기 시작했다. B.C.2세기 초반이 되자 헬라문화가 본격적으로 밀려왔다. 에센파는 그 본질상 바로 이러한 급격한 헬라화에 대한 일종의 강력한 저항 운동이라 하겠다. 안티오커스4세가 셀로이키드 왕국의 대권을 잡자 당시 개혁 바람을 반대하던 대제사장 오니아스 3세가 대제장 직에서 쫓겨나고 그 자리에 친 헬라화 경향을 표방하는 그의 동생 야손이 들어갔다. B.C. 172년 사독가문 출신이 아닌 평범한 가정출신의 메네라 오스가 야손의 대제사장의 자리를 다시금 매수하여 차지했다. 이러한 대제사장 직의 교체는 일찌기 들어 본 적이 없는 일이였다. 대제사장직은 오직 사독가문 출신의 사람만이 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여전히 외아스 3세가 경건한 유대인들이게는 적법한 대제사장인 셈이었다. 메네라오스는 늘 눈에 가시 같았던 오니아스 3세를 살해함으로써 자신의 경쟁자를 제거하였던 것이다. 이 살해가 경건한 자들이 아마의 조직을 갖추어 결속하게끔 만든 직접적인 원인이다. 유대 종파중 하나인 에센파 사람들은 훗날 이 살해시기를 종말의 심판이 있기 전 마지막 100년간의 세계사가 시작되는 시기로 생각했다. 메네라오스의 이러한 헬라화 정책은 B.C. 167년에 절정에 달했다.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던 경건한 유대인들은 산속 유대사막 이웃나라로 피신했다.

메네라오스의 과격한 헬라화 정책은 많은 이주민과 함께 반발세력을 키웠다. 모데인 이라는 작은 동네에서 마티아스라고 불리는 제사장과 그의 다섯 아들은 이방의식에 따른 제사봉

헌을 거부하였다. 마티아스는 봉헌물을 바치려는 셀로이키드 왕구의 관리를 살해하고 제단 을 부순 뒤 아들과 함께 산으로 도망쳐 무장저항 모임을 만들었다. 이와 같은 마카비 가문의 봉기에 하시딤들도 가담하였으나 나중에 마카비 사람들이 안식일에도 군사작전을 벌인다

는 이유로 공격을 받더라도 저항하지 않고 죽음을 택하겠다는 파와 성일에 공격을 받을 시

최소한 방어하겠다는 파로 갈라졌다. B.C.164년 승승장구하던 마카비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진군하여 제우스 신전제식을 종식시키고 다시금 이스라엘의 전통의식을 회복시켰다. B.C.157년에 팔레스타인을 지배하던 셀로이키드 왕국은 마티타아스의 아들인 유대군 총지휘자 요나단 과 평화 협정을 맺었다.

152년 요나단이 무력으로 대제사장직을 강취할 때에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한 적법한 대제사장이 있었다. 우리는 발견된 쿰란 문서를 통하여 에센파 사람들이 그를 의의 교사라고 불렀음을 본다. 요나단은 이 의의 교사 가 소지한 합법적인 사독 가문의 대제사장직을 강제 로 빼앗았던 것이다. 의의 교사는 요나단의 살해 음모를 피해 무사히 예루살렘을 탈출하여 시리아로 정치망명을 하였다. 여기에서 그가 새 언약공동체의 지휘권을 넘겨받았는데 바로 이 공동체가 에센파의 모체가 된다. 요나단이 대제사장직을 강탈당할 때인 B.C. 152년을 의의 교사는 종말의 시대가 도래 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새 공동체의 지휘권을 넘겨받은 뒤 의의 교사는 망명 중에 있는 경건한 자들의 모임 의 일부분을 포함한다. 다른 여러 유대인들의 모임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공동체에 합류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당시 유대교 내에서 가장 큰 조직체를 갖춘 에센파 공동체를 오니아스 3세가 살해된 지 20년이 지나서 대략 B.C. 150 년경에 결성할 수 있었다.

그는 이 공동체를 하야이드 지역 공동체(ha-yahad )라 불렀다. 이 에센파 연합체의 설립이 어디에서 이루어 졌는지 알 수 없다. 에센파 설립이 있은 뒤 약 50년간이 지나서야 쿰란거주지가 생겼기에 쿰란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에센파 말고도 당시 유대교 내에는 세 개의 도 다른 그룹이 있었다. 첫째는 유대로 돌아가기를 거부한 시리아의 다마tm커스에 남아 잇던 일부 새 언약 공동체 원들이었고 둘째는 의의 교사에게 동조하기를 거부한 하시딤의 일부분이다.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바리새파 라고 불렀는데 이는 원래 분리주의자 라는 뜻으로 비난에 찬 이름이다. 셋째는 요나단에게 동조하는 예루살렘의 성전 제사장 계급들이다. 이 성전 제사장들은 훗날 독립된 조직을 갖추게 되는데 이를 사두개파라고 한다.

 

2.지리적 특성

이스라엘의 지형을 보면 유사한 경관이 남북 방향으로 달리고 있으나 이것을 동서 방향으로 보면 큰 변화가 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서쪽에서 동으로 향하여 해안 평야 중앙 고지대 요단 지구대 트란스 요르단의 4지구로 나뉜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오래된 암석은 아카바만의 서족 구릉지에 캄브리아기의 화강암과 고생대의 누비아 사암이 있고 기타 대부분의 전체 지역에 중생대의 석회암 백아 신생대 제 4기의 백아 석회암 현무암 제 3기의 퇴적층 사구 충적토 이 분포되어 있다. 이스라엘의 동쪽과 네게브 사막지대에는 초지를 이용하는 유목민이 살고 있었다. 즉 아말렉족 남부 광야 미디안 족 아카바 만 동족지역 이스라엘 족 팔레스타인 남도쪽 지역 등이며 이들은 모두가 아라비아 인드리라고 한다. 현재 이스라엘에는 베드인이 약 만 명이 있다. 2베두인은 낙타를 주력으로 하는 완전한 사막의 유목민이다. 이 밖에 같은 생활자로서 양과 산양을 주력으로 하며 오아시스에서 과히 멀지 않은 곳으로 이동하는 수와야와 일정한 정주 가오게 거주하는 가와라니가 있다. 베두인은 낙타만을 유목으로 완전한 유목민을 말한다. 그것이 확대되어 수와야를 포함시키는 겨우도 있다. 본래의 베드인은 농경을 철저히 싫어하고 가옥과 성채를 경시하며 오로지 낙타의 젖과 종려나무 대추야자 의 열매를 먹고 산다. 그들은 도시민이 기호하는 포도주를 금하며 모든 종류의 도시적 조직화를 거부한다. 이들은 겨울의 우계에는 풀이 자라는 대초원지대에 살다가 봄이 되어 풀이 말라 죽으면 양떼를 몰고 비교적 풀이 넉넉한 시냇가의 평야지대로 이동한다.

사막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항상 절반가량은 굶주린 채 살아갔다. 그래서 유목민들은 언제나 농경민을 부럽게 보아 그들은 기회 있는 대로 농경지역을 습격하여 약탈하는 일을 했다.사해 북서족의 쿰란 지역에서 쿰란 사본을 발견한 사람이 바로 이 베두인족이다. 이스라엘은 이질적인 구성으로 큰 지역을 이루고 있다 쿰란이 있는 유다 지역은 요단 지구대이다. 요단 지구대에는 요단강 상류 훌레 분지 요단 협곡 사해와 호반 유다 광야 아라바 계곡 6개의 소단위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요단지구대의 형성 요단 지구는 수리아의 레바논 산맥사이의 골짜기를 남하하여 훌레 호 갈릴리 호 요단협곡 사해 골자기 아카바만에 이르는 곡 폭이 좁고 기다란 골짜기 이다. 최북단의 도시에서 아카바 만까지의 거리는 약 500km 를 조금 넘는다. 이와 같이 좁고 기다란 골짜기가 생기게 되었다 지구대 전체의 약 2/3 는 지중해보다는 낮다. 북으로부터 훌레호 갈릴리호(-212m) 여리고 사해(-260m) 아라바 계곡(-398.5m) 으로 이어진다. 이 지구대 일대는 지각이 약하기 때문에 지진이 일어난 일이 많고 갈릴리 호수와 사해 부근에는 그 여파로 온천이 솟아 나온다.

쿰란은 사해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사해란 명칭은 성서에는 아라바 바다 또는 염해라고 기록( 신3:17) 되고 있다. 창세기 14:3 에는 싯딤 골짜기 곧 지금 염해라고 하였다. 이처럼 싯딤 골짜기와 염해를 동일시하였는데 아마 현재 물에 침몰된 사해 남단의 얕은 곳이 싯딤 골짜기일 것으로 추측된다. 사해에는 한 마리의 물고기도 서식하지 못하고 사람도 물에 잠기지 않고 염분이 많기 때문에 그 이름을 염해 사해라고 부르게 된다. 사해의 염분 함유량은 계절과 장소의 깊이에 따라 다르다. 일반 해수의 4.5% 염분은 인데 사해는 31.5%의 염분을 함유하고 있다. 쿰란은 지리상 유다광야에 속한다. 예수께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신 유다 광야는 유다 산지와 사해사이에 펼쳐져 있는 누르스름한 지역이다.

구약시대에는 예시몬(yesimon) 황야의 뜻이라 일컬었다. 유다 광야에서는 옛날부터 유목민 베드인 족이 양 산양을 쫒으면서 천막생활을 했다. 그 남북 길이가 75km 이고 동서 폭16-25km (평균 19km)다. 서측에는 900m의 유다 산지가 가파른 급경사로 솟아 있다. 특히 사해의 위쪽 최종 단계는 거의 수직에 가까운 단애가 되어 마치 병풍을 두른 것 같다. 그 단애의 높이는 150m 또는 그 이상 된다. 또 와디들을 깊이 파서 내렸기 때문에 2-3km의 간격을 두고 협곡을 형성하였다. 유다광야는 서쪽 산지가 몹시 높기 때문에 지중해 상에서 불어오는 습기를 포함한 비바람이 막혀 좀처럼 비가 내리지 않고 아주 건조하다 따라서 나무가 자라지 못하고 석회암의 암산과 구릉이 물결치는 황량한 고원성 광야이다. 서측 산지는 높고 급경사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곳과 유다산지와의 교통은 크게 저해되고 있다. 유다광야에서 유대산지 방면으로 통하는 도로는 여리고에서 아이성 벧엘로 가는 길이 있었는데 이것은 고대 상업도로뿐 아니라 여호수아의 군대가 여호수아의 군대가 유다산지를 공격에 사용한 도로였다. 이 길의 중간에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이 있는데 이것은 예수께서 늘 왕래 하시던 길이다. 비유중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사건이 일어난 길이다. 엔게디에서 헤롯디움을 지난 헤브론에 이르는 길이 있다. 또한 사해 자체도 교통상의 장애가 되어 유다광야는 완전히 고립된 폐쇄 지역이다. 이 지역에는 석회암 동굴이 많은 것이 특색이다. 이 동굴들은 기후가 극히 거조하여 습기가 없어서 고대에는 사본과 같은 문서를 보관하는데 많이 쓰였다. 물이 극히 적은 이 지역은 거주의 제약을 받았다.

 

Ⅲ. 쿰란의 유적과 사해사본

 

1.쿰란의 유적

쿰란사본과 쿰란공동체의 유적이 발견된 곳은 사해의 북서 연안지역이다. 쿰란이란 낱말 은 동굴이 위치하고 있는 와디 아랍어로 우기에만 흐르는 강 계곡 의 명칭에서 유래한 것이다. 쿰란은 1947년 사해 사본 이 처음 발견된 동굴로 유명해졌다. 와디 쿰란 수로 의 북쪽 사해에서 약 1.6km 떨어진 곳에 있는 키르베트 쿰란 아랍어로 쿰란 유적지라는 뜻에서 행해진 발굴을 통해 건물들의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사해 사본의 소유자인 에세네파 공동체가 살았던 곳으로 추정 된다. 건물 주변으로는 넓은 묘지가 있다 1950년대에 면적 80.4 ㎡정도의 지역에서 일련의 건물들이 발굴되었다. 가장 중요한 건물은 직 각형 모양의 대규모 건물로서 위층에는 문서실이 있고 북서쪽 모서리에는 2층으로 된 거대한 석조 방어탑이 있다. 그 후에도 여러 개의 물웅덩이와 저수지 대장간 제분소 약 1,200개의 무덤이 있는 묘지 그리고 공동 식사 때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방 등이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었다.

발굴과정을 살펴보면 1947 년 초에 타아미레(Ta'amir )도 지파에 속한 무하마드 앗디브란(Muhammad Adh-Dhib) 이름을 가진 베두인 목자 한사람이 잃어버린 양을 찾던 중에 와 디 쿰란(the Wadi Qumran) 의 가파른 암벽에서 동굴을 하나 발견하였다. 그가 그 동굴 속에 숨어 있을 지도 모를 짐승들을 쫓아내기 위한 목적으로 돌을 던졌을 때 그는 무엇인가가 깨지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동료 한 사람의 도움을 받아 그는 동굴까지 올라가서 그 안에 깨어진 항아리들을 발견하였는데 그 항아리들 주 어떤 것들은 가죽 파피루스 두루마리들이 헝겊으로 쌓여진 채 들어 있었다. 그 지파 사람들은 그것들이 골동품으로 가치가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 두루 마리를 들고 내려왔으며 수개월이 지나 뒤에 그 문서들은 수리아의 예루살렘대 주교인 마르 아타나시우스(Mar Athanasius Yeshus Samauel) 예수에 사무엘 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대주교는 그것들이 아주 오래된 문서임을 깨닫고 그 동굴에서 나온 사본들을 모두 구입할 수가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완전한 이사야 사본이었으며 다른 것들은 단편들이었다. 그 직후에 예루살렘의 히브리 대학 수케닉(E.L.sukenik)이 베들레헴의 한 골동품 상인으로부터 고대의 두루마리 몇 개를 수입하였다. 이 두루마리들은 그가 죽은 후에 예루살렘에서 출판되었는데 불완전한 이사야서 사본하나 전쟁문서하나 그리고 여러 항목으로 된 찬송가집 하나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사야서 사본은 예루살렘의 대주교가 구입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단편적이었으나 40장 이후에 나오는 예언은 아주 잘 보전되어 있었다. 결국 사무엘 주교가 소유하고 있던 두루마리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미국 동양학 연구소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트레버가(J. Trevere) 그 두루마리들을 나스(Nash) 파피루스의 고대의 것이라 고 확신하게 되어 지체 없이 그 두루마리들을 사진으로 찍어 두었다. 이사야 두루마리의 인쇄본 하나가 올브라이트(W.F. Albright)에게 보내어 졌는데 그는 그 자료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은 말로 증언하였다.

 

"현대에 와서 이룩된 가장 위대한 사본 발견에 대하여 본인은 충심으로 치하를 드리는 바입니다. 본인의 생각으로 이 필기체가 나스 파피루스보다 훨씬 고대의 것이라는 점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없습니다. 이 사본의 신빙성에 대해서 의심할 사람은 세상에 한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이 발견이 성서고고학자(the bible archaeologist) 라는 잡지에 발표되자 요단 동편과 아랍 팔레스탄에 대한 고고학적 발견들에 책임을 맡고 있던 하딩(G.L.Harding)에게는 미묘한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물건들이 요단 지역으로부터 옮겨간 것은 법에 위반이 되기 때문이다. 하딩은 두루마리들의 존재에 대해 전혀 몰랐었기 때문에 그 지역을 재발견하고 발굴하는 문제는 더욱 더 어려워지게 되었다. 1949년 미국 동양학 연구소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 마가 수도원에 소장되어 있던 두루 마리들을 잠정적으로 입수하여 그 중 두루마리 세 개를 뉴 해븐에서 복사하여 출판하였다. 나머지 두루마리는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라멕서(book of Lamech)란 외경으로 생각되었는데 펴 볼 수 가 없었는데 6년이 지난 후에 비버라우트(J. Biberkraut)교수가 그 문서의 내용을 밝혀 낼 수 있었다. 그 두루마리는 족장 시대를 해설적인 형태로 다룬 창세기 초반부에 대한 아람어 번역판임이 판명되었다. 그리고 그 이름은 외경 창세기라고 되어 있었다. 쿰란에 있는 그 본래의 동굴은 1949년 그 위치가 확인 되었으며 하딩 드(G.L. Harding) 그리고 도미니카(R.de Vaux) 성서 학교 회원들에 의해 면밀히 답사 되었다. 그러나 불법적인 조사자들이 공식적인 일행보다 먼저 손을 썼기 때문에 그 작업은 더욱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피루스와 그 가죽으로 된 단편들이 600여개 발견되었으며 그 이외에도 깨어진 도기들과 토착 린넨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이 때쯤 해서는 베두인 지파 사람들이 그런 물건들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으며 그래서 그들은 다른 동굴들을 더 조사했다. 1951년 쿰란에서 남쪽으로 11마일 떨어진 와디 무라바아트 (wadi murabb'at) 에서 자료가 더 발견되었다. 그 자료는 네 동굴로부터 나왔으며 글자가 새겨있는 도기 조각 직물 희랍어 및 히브리어 파피루스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조사해본 결과 그 파피루스들 중 어떤 것은 시몬 바르코크바 (Simon Barkokhba)가 여수아 벤 갈고라(Joshua ben Galgora)란 사람에게 말한 것이었음이 확인되었다. 그 다음해 답사에서 구약성서의 많은 단편들을 찾았다 쿰란 동굴의 세 번째 동굴로부터 고고학자들은 동판 두루마리 두개를 발견했지만 심하게 녹슬어서 펴 볼 수 가 없었다. 1956년에 그 두루마리들이 맨체스터 공학대학에서 특별한 방법으로 펼쳐졌으나 5%가 상실되었다. 그것들을 번역해본 결과 거기에는 여러 지역에 매장되어 있는 보물 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키르벡 쿰란과 키르벳 밀드에서 잇달아 발견된 사본이 남아 있는 동굴은 11개이다. 고고학자들은 편의상 여러 동굴들을 그 동굴들이 위치해 있던 해당 지역들과 연관 시키는 설명법을 고안해 냈다. 따라서 제 4 쿰란(4Q)은 쿰란에 있는 네 번 째 동굴을 가리키는 것이며 제 2 무라바아트(2Mu) 는 와디 무라 바아트(the Wadi Murabbaat) 지역에 있는 둘째 동굴을 의미한다. 1951년에 일단의 고고학자들이 와디 쿰란 근처의 바위 시렁 위에 있는 폐허 지역 혹은 키르베(khirb)도를 발굴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곳은 먼저 그 지역을 방문했던 사람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 곳을 잘 발굴해 본 결과 그 폐허되어진 넓은 저수지가 구비되어 있는 공동체 건물의 유적을 이루고 있었는데 제 1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항아리 유물과 비슷한 한 개가 발견됨으로써 나중에 제 1쿰란에서 나온 사본들과 연결되게 되었다. 쿰란 문서들 중에 여러 가지 항아리에 보관되어 있는 사실은 근동 지방의 관습의 오랜 전통을 그대로 반영해 주고 있었다. 근동 지방에서는 항아리가 귀중한 것을 넣어두는 후세 사람들을 위해 문서를 보관해 두는 금고와도 같은 역할을 하였다 한 외경문서는 이런 상황 속에서 문학 자료를 확실히 보전시키기 위해 취해졌던 조치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너는 이 기록을 맡아서 읽고 내가 네게 넘겨 줄 책들을 보관하는 방법을 배우라 그리고 너는 그 책들을 순서대로 챙겨서 삼목에서 나오는 기름으로 그 책들을 발라서 토기 속에 넣어 두어야 할 것이다.”

 

이런 주의 사항들이 주어졌기 때문에 커다란 이사야 두루마리가 발견되었을 때까지 훌륭한 상태로 남아있게 되었으며 오직 열 군데의 훼손과 많은 작은 구멍들만 생겼을 뿐이다 하박국 해설서는 매우 분명한 글씨로 기록되어 있었고 글자들이 엷게 그어진 줄밑으로 쓰여 있었다. 이 11사본의 본문은 여러 단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서기관의 별다른 교정 없이 갱의 단으로 되어있었던 공동체 규약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또 그 사본은 정자법으로 기록되어 있었으며 다른 본문들과 비슷한 언어학적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사본을 베끼는데 사용된 잉크는 단순한 비금속성 성분의 혼합물이었다. 쿰란 자료의 신빙성과 연대에 관해 신랄한 토론이 일어났었다. 이 당시의 논쟁에는 쿰란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와 확인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잇달아 발견되는 고고학적 자료들로 인해 가장 오래된 것은 3세기경의 것으 로 이사야 두루마리와 공동체 규약은 100년경의 것으로 전쟁문서와 감사시들 수케닉의 이사야와 두루마리 그리고 외경 창세기 등을 주전 1세기 초로 생각하였다. 2제 동굴에서 낭 린넬의 단편들은 탄소 14 라는 동위원소로 연대를 측정해 본 결과 주전 168년부터 주후 233년까지의 범위를 보여 주었다 .

쿰란 공동체(yahad) 의 성격은 대부분 두루마리 그 자체들로부터 확정될 수 있다. 공동체규약에 의하면 이 종파는 제사장들과 평신도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하나님께 대한 엄격한 헌신 속에서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사본은 계약 안으로 들어오려고 원하는 사람들에게 부과하는 요구 상항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되고 있으며 입회하는 예식 형태에 대한 언급으로 계속 되고 있었다. 각 회원은 복종하겠다는 서역을 해마다 새롭게 하여야만 하는데 이 때에 그는 그 형제단에서 축출 당하게 될지도 모를 자신들의 결함을 기억하였다.

이 종파는 제사장들과 장로들 밑에서 성경공부를 계속하며 제사적인 예배의 형태에 참석하도록 조직되어 있었다. 이 종파의 영적이 원수이며 세속적인 원수들은 악한 제사장과 무자비 한 깃딤 사람들이었다. 악한 제사장은 모세 율법을 해석해 주고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예언적 신비들을 전달해 주던 이 형제단의 지도자 의로운 선생을 반대하였다 의로운 선생이 쿰란에 현존해 있으면서 활동하고 있던 사실에 메시아 시대가 가까워 왔음을 암시해 주었다. 그러나 확실히 악한 제사장이 의로운 선생을 깃딤 세력에 넘겨줌으로써 그를 죽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종파의 사람들은 깃딤 사람들을 묵시적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도구로 생각했다. 깃딤의 전체에 대한 논란이 많았다.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그 명칭은 구브로(Cyprus 사 23:1 렘2:10 겔27:6 민24:25 단11:30 참조) 혹은 일반적으로 동부 지중해지역을 의미했다. 후대의 유대교 저자들은 그 용어를 승리적 세력 이라는 은유적 표현으로 보고 깃딤 사람들이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의 군대 알렉산더 야네우스 시대의 셀루싯 혹은 로마 군대 로마시대 전체의 군사세력 제 1차 유다 전쟁 주후 66-70 년 때 활동했던 어떤 침략집단 또는 중세기독교 시대의 십자군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밝혔다 해설서에서 깃딤 사람들이 그들 깃발에 제사를 드렸으며 무기들을 숭배했다는 말이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독수리를 경배했고 그것들에 제물을 드렸던 로마 사람들과 일치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해설서에서 언급되고 있는 개인들이나 집단들의 정체는 좀더 확실한 자료가 나타날 때까지 상상의 무제로 남게 될 것이다.

이 종파의 사상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메시야 내림의 기대였다 제 4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한 사본은 이 공동체의 메시야 사상을 요약해 주는 성서의 본문으로 구성되었으며 첫 번째동굴에서 나온 한 문서는 회중들의 규칙 이란 제목이 붙어 있었는데 새로운 메시야 시대에 갖게 될 대 잔치의 장면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쿰란 문서들에서는 의로운 선생 에게 메시야적인 지위가 부여되어있지 않지만 그가 항상 하나님 뜻의 해석자로서 그리고 메시야 시대의 선구자로 생각되고 있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쿰란 공동체와 에세네 종파사이에 표면적인 유사점도 있지만 차이점도 있다 에세네 종파는 독신주의자들로서 공동생활을 하였으며 세속적인 생활을 버린 자들을 회원으로 받아들였으나 쿰란 종파는 여자들도 그들의 형제단 안에 받아 들여졌다 짐승제사에 관심이 없던 쿰란 종파와는 달리 에세네파는 짐승제사를 어느 정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쿰란과 에세네파가 동일하다는 증거가 없기에 동일시하는 데는 주의가 필요하다.

 

2. 사해 ( 쿰란 ) 사본

1947년에 사해 사본이 발견되기 전까지 가장 초기의 히브리어 사본은 주후 900년 경까지 소급되었다. 그러나 쿰란에서 발견된 사해 사본은 주전 2세기의 것들로 히브리어 본문이 전 수되는 과정에서 상당한 주의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고 이전에 일부 학자들이 생각

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맛소라 본문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사해 사본 은 인경의 전승보다도 맛소라 학자들의 전승을 더 많이 따르고 있으며 많은 고대자료들 70의 철자법의 변화 단계를 반영해 주고 있다는 점 외에도 기독교 발생 직전 시대의 히브리어가 어떻게 발음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도 커다란 가치가 있다. 또한 사해 사본은 히브리어가 주전 2세기 전에 이미 사어가 되었다는 견해는 잘못되었음을 입증해 주었다. 쿰 란 4동굴에서 나온 사무엘 상 단편은 맛소라 본문을 상당수 보존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사해사본의 증거를 볼 때 제 2전승시대의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최소한 세 종류 이상 의 히브리어 본문이 통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맛소라 본문은 여러 문헌 전승 들 가운데 단지 한 가지 전승만 따르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1947년 사해 사본이 발견

된 이래로 서부의 쿠란 와디 무라바트 나할 헤베르 등지에서도 148개에 달하는 크고 작은

분량의 성경 사본들이 발견되었다 이들 중에서 중요한 사본 3개만 발췌한다.

 

a. 제 1동굴에서 나온 필사본(1QIsa)

이 사본은 본질적으로 맛소라 본문을 지지해 주고 있지만 상당수의 이독들이 있다. 이 이독들 중 다수는 초기 역본들에서 발견되는(variants) 이독들이나 현대 학자들이 제안한 수정안들과 일치하고 일부는 쿰란 공동체가 히브리어 본문들을 나름대로 특색 있게 해석한 경우들도 있다. 제 BHK 3판에서는 사본들에서 철자법사의 이독에 속하는 4500개가량을 제외한 나머지 1375개의 이독을 비평장치를 통해 보여 주고 있다. 제 2이사야 필사본(1QIsa)은 단편으로 남아 있지만 맛소라 본문에 매우 가깝다.

b. 제 1동굴에서 나온 하박국 주석서 (1QpHab)

이 두루마리는 두 장의 가죽으로 서로 실로 꿰매어 묶은 것으로 윗부분만 보존되었다 하박국서의 첫 두장에 나오는 구절이 인용된 후 이어 당시의 정치적 종교적 상황이 하박국에 의해 어떻게 예언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부석 부분이 뒤따른다. 이 두루마리에 나오는 하박국 1-2장의 맛소라 본문가 다른 읽기들은 진지하게 고려해볼 가치가 있다.

 

c. 제 11동굴에서 나온 시편 두루마리 (11QPs)

이 두루마리에는 정경인 시편의 마지막 1/3에 나오는 41편의 시들 7편의 외경 시편들이 있다. 시편들의 배열 순서가 맛소라 본문과는 상당히 다른데 외경 시편들이 정경시편들 가운데 삽입되어 있다 이 시편 두루마리는 원래의 시편 책이 아니라 예배용 시편 선집이다.

 

3. 사해사본과 구약성서

쿰란에서 성경의 사보이 발견됨으로써 마소라 본문이 형성되기 이전의 히브리어 사본을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보았던 학자들의 생각은 사라져버렸다. 그 두루마리들이 매우 고대의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인정되면서 고문서학자들과 비평학자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본문 자료들을 향상시킨 중요한 자료를 입수하게 되었다 성경사본들은 히브리어 본문을 그대로 전달시키는 일에 엄청난 주의를 기울였다는 일반적인 견해를 그대로 확증해 주었다. 그리고 마소라 본문 혹은 전통적 본문을 중시하였음을 보여 주었다 초기의 연구를 통하여 그 두루마리들이 희랍어 70인역 보다 마소라 전통을 따르고 있었으며 또한 철자법과 이름의 형태에 있어서는 고대의 자료들을 반영해주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두루마리들이 히브리어 정자법의 변천과정을 보여 주고 기독교시대 이전의 히브리어 발음을 알려주기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고대의 여러 언어들이 어떻게 발음이 되었는지 어느 누구도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 신비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는 정보였다 그 사본들은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던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아람어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지역에선 아직히브리어가 구어로서 계속 사용되어 지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히브리어가 이미 주전2 세기 전에 사어가 되었다는 주장은 정확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제 4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사무엘상서의 단편들이 70인역이 근거로 삼았던 히브리 본문과 똑같은 전통을 나타내어 주기에 희랍어 70인역의 본문 연구들이 상당히 자극을 받았다 문헌 전승이 표준화되기 전의 발전단계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구약성서의 본문역사에 매우 중요하다 두루마리들이 성서연구에 있어 새로운 시대를 수립했고 그 결과 이미 알려진 내용이 확증되기도 했으며 또 사실로 인정되던 내용이 수정되어야 하기도 했다는 점에는 의심할 여지도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귀중한 업적으로 말미암아 기독교 이전 시대의 정확한 구약성서 본문을 완전히 재구성하여 하나님의 옛 말씀을 현대의 독자들에게 좀더 잘 이해 할 수 있게 만들려는 운동이 생겨나게 될 것이다.

 

4.쿰란 텍스트와 신약성서

신약성서에는 예수와 초기 기독교인들 및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사이의 직접적인 만남에 관하여 반복하여 기록되어 있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쿰란 공동체나 엣센파 삶들과의 대립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다 비록 이들이 사해 해변에서 격리된 생활을 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경건함과 교리의 모범은 어떤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래서 쿰란 공동체에서 발전된 사상들은 그 공동체를 초월하여 당시의 유대교 안으로 넓게 유포되었고 수용되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쿰란 공동체의 사상을 수용하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하면서 사용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신약성서의 여러 곳에서 알 수 있다 쿰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요르단 강가에서 세례 요한이 막(1:4) 등장하여 설교하면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다. 쿰란 사람들 역시 외적인 새신자만 가지고는 인간이 정결을 회복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으며 회개를 필요로 하였다. 정결은 참회하는 마음과 더불어 얻게 되는 것이었다.

이사야 40장 3절(1Qs. 4-9; 13-14)의 성서 말씀은 세례 요한의 선포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이 쿰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광야에 거룩한 공동체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쿰란의 거룩한 공동체가 율법을 중심으로 엄격한 질서 하에 들어와 다른 사람들과 격리된 생활을 영위하는 반면 세례자 요한은 정확하게 정해진 규칙을 따라서 살아야하는 공동체를 세우지 않고 오히려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앞으로 오는 자의 도래를 예비하도록 외쳤다. 요한의 활동은 오직 그보다 더 강하며 앞으로 도래하실 그분의 선포에만 전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공동체는 세신만을 반복한 것이 아니라 단 한번의 세례로써 정결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으며 메시야의 전환점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예수는 그의 선포 속에서 획할 것을 외쳤고 인간이 그 절대적인 요청에 회피 할 수 없는 하나님의 급진적인 계명을 가르쳤다. 그렇지만 예수의 선포(마5:21-48)에 있어서 회개는 쿰란 공동체와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이해되어졌다. 즉 하나님의 통치가 가까이 왔고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뜻 동시에 그의 선물로 주시는 자비가 직접적으로 인간에게 관계되기 때문에 예수의 선포에 있어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이 올바른 것이었다. 죽기직전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최후의 식사는 공관복음에 따르면 유월절 식사였으며(막14:12-25) 요한복음의 표현에 따르면 그 식사는 하루 더 일찍 있었기 때문에 예수는 쿰란 공동체의 의식에 다라서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추측하기도 한다. 쿰란에서는 모든 빛의 아들들을 사랑해야 하고 모든 어둠의 아들들을 미워해야한다고 가르쳤으나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그들을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쳤다.(마5:43-44)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비에는 어떠한 한계도 잇지 않기 때문이다. 쿰란 공동체와 같이 초기 기독교도 스스로를 마지막 때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성서의 약속이 주어진바 가난한 사람들과 거룩한 사람들로서 알고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선택받은 자들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1Qs, 6)이라고 불렀다.(눅2:14)

쿰란 공동체에서는 나사렛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메시야로 신앙 고백하는 기독교회는 유대교가 메시야적 구원의 시대를 기다리는 희망의 표현으로서 사용했던 여러가지 존귀한 칭호들을 예수께 돌렸다 쿰란공동체가 예언자와 메시야적 왕과 메시야적 대제사장을 고대하였다면 기독교인들에게는 하나님에의 기름 부으심을 받으신 단 한분만이 메시야적 왕이요 하나님의 예언자요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제사장이 되신다. 신약성서에서 요한의 서신들 속에는 쿰란텍스트의 많은 진술들과 접촉한 뚜렷한 흔적들이 발견된다. 쿰란 텍스트는 경건하고 율법에 신실하던 유대인들이 예수와 사도들의 시대에 생각하고 믿고 희망하였던 사상과 견해들을 밝혀준다 예수와 초기 기독교인들은 복음의 선포가 구원의 시대를 고대하고 있던 당시의 경건한 사람들 사이에 제기 되었던 것과 같은 문제에 대하여 타당한 답변을 준다는 사실을 증명하여 보이기 위해 쿰란 텍스트에서 형성되니 표현과 개념들을 여러 번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쿰란 텍스트는 초기 기독교의 서교가 분명하게 나타나는 배경을 밝혀주고 있다.

 

Ⅳ. 쿰란공동체와 에세네파

 

1. 형성배경

쿰란의 발굴 작업이 진행됨에 따라서 그 지역에는 주전 110년경부터 31년경까지 한 종교 적 공동체가 살고 있었음이 분명해졌으며 그 이후에 지진으로 인해 그 건물들이 파괴된 임이 확실시되고 있다. 30년 동안의 기간이 경과한 다음에 그 지역에는 또 다시 다른 종파 가 정착해 살고 있었으며 나중에 가서 주후 68년에 로마 군인들이 그 건물들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 곳은 제 2유다 반란 주후 132-135년 때에 유대인 게릴라들이 잠시 사용하였으며 그 이후에 지진으로 인해 그 건물들이 파괴된 것이 확실시 되고 있다. 30년 동안의 기간이 경과한 다음에 그 지역에는 또 다시 다른 종파가 정착해 살고 있었으며 나중에 가서 주후 68년에 로마 군인들이 그 건물들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 곳은 제 2유다 반란 주후 132-135년 때에 유대인 게릴라들이 잠시 사용하였으며 그 이후로는 유기 상태로 버려진 곳이었다. 공동체 생활은 주요 본관 건물을 내려다보고 있는 방어탑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 는데 그 탑은 약 120 평방피트로 건축되어 있었다. 남쪽에 있는 큰 방은 아마도 주요 식당 이었을 것이며 거기에 붙어 있던 부엌에는 흙으로 만든 그릇들이 수백 개 남아 있었다. 남 서쪽에는 집회소로 이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방들이 아주 많이 있었다. 이런 것들 중 어느 한방에서는 각 벽을 따라 석고로 만든 긴 의자의 유물들이 발견되었으며 한편 다른 방에서는 잉크병들 책상들 그리고 의자들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공동체의 사본 기록실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이 공동체 원들이 이 방에서 두루마리 사본들을 베꼈을 것이다. 이 지 역의 남동쪽에는 한 작업장의 유적이 있었으며 이 작업장 안에 금속을 제련하며 토기들을 굽는 시설들이 마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공동체가 자급자족의 생활을 했던 것을 암시해주고 있다. 그 근처에는 저수지와 도수관 시설이 되어 있어서 정착생활에 풍부한 물을 제공 해 주었다. 어떤 저수지들은 층계를 따라 내려가도록 되어 있어서 그 못이 대로는 세례예식 을 위해 이용되기도 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본관 건물 서쪽에 있는 한 방을 발굴 했을 때 감추어 있던 동전 600여개가 발견되었다. 그 동전은 이 지역의 정착 역사가 주전 139년 부터 로마에 대항한 제 2 유다 반란 때 까지 계속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이 지역의 흥미 있는 또 다른 특징은 키르베에 인접해 있는 매장지의 발견이다 그런데 그 매장에 보면 무 덤들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뻗은 평행선으로 놓여져 있었다 계속 잇달아 발견된 해골들은 보전 상태가 아주 좋지 않았으며 여자의 뼈가 약간 포함되어 있었다 무덤들의 단순성과 매장장식품이 없던 것으로 보아 이 종파가 검소했음을 증명한다.

에세네파는 B.C. 2세기 요나단 마카베와 그 뒤를 이은 시몬 마카베가 대제사장의 자리를 빼앗아 교권과 왕권을 겸하게 되자 유대교 사회에서 분리되어 나왔다. 시몬 마카베는 제사 장직 찬탈을 반대하는 에세네파를 박해했으며 에세네파는 정의의 스승(Teacher of Righteousness)을 따라 광야로 도피했다. BC 2세기 중반 에세네파의 수도원 공동체가 세 워졌다. 시기상으로는 시몬 마카베 재위기간(BC 143/142~135/134)이라고 추정되며 요한 히르카누스 시대 이후는 아닐 것으로 보인다. 헤로데 대왕의 짧은 재위(BC 135/134~104) 기간을 제외하고 베르파시아누스가 이끌던 로마 군대에게 중심지를 파괴당할( B.C. 37~4)때까지 에세네파가 계속 거주했다. 유대 지방에 살던 에세네파의 다른 집단과 마찬가지로 쿰란에서 흩어져 살던 에세네파 신도들은 예루살렘의 사악한 제사장들이 패망하고 참다운 제사장이 나타나 참다운 이스라엘로서 자신들의 공동체가 설 것이라는 계시를 믿었다. 에세 네파 사람들은 성서학습 육체노동 예배 기도에 힘썼으며 구세주의 성찬을 예언적으로 기념 하는 의미에서 식사는 공동으로 했다 그들의 세례식은 회개를 의미하며 하느님이 택한 백 성 이 되는 것을 상징한다.

 

2.쿰란공동체와 에세네파

쿰란 공동체가 에센파에 속한다는 사실을 아래의 다섯 가지 특징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이 특징들은 쿰란 문서 자체에서뿐만 아니라 필로와 특히 요세프스의 보도에도 잘 나타난다.

a. 공동식사

각 지역 공동체에 속한 회원들이 하루에 두 번식 함께하는 공동식사에서 에세네파의 독특

한 특성이 가장 잘 나타나는 것 같다. 그런데 오직 정식 식사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최소 한 열명이 한자리에 모여야 한다 또한 그 가운데 적어도 한 명 이상의 제사장이 있어야 하 며 그 때 모든 회원들은 자신의 서열에 따라 자리에 앉게 된다 제사장은 공동식사의 사회 를 맡게 되는데 음식과 음료에 축도를 한 뒤에 식사가 시작된다. 이 식사는 기독교에서의 성만찬과 같이 성례전적인 성직을 띠지 않고 정결한 사람들만이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볼 때 단지 제의적 성격만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쿰란언덕에 대한 고고학적인 발굴 을 통해서도 입증된 1QS Ⅵ,2-6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그들은 작업 일이면 소유와 관련하여 낮은 자는 높은 자에게 순종해야하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식사를 해야 하며 함께 찬송을 하며 조언을 구한다 그리고 공동체원 중 열 사람이 모인 곳에서는

그들 중에 제사장이 빠져서는 안 된다 그들은 저마다 자신의 신분에 따라 제사장 앞에 앉아야한 다. 그리하여 문제가 있을 때마다 그들의 조언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식사하기 위하여

식탁을 놓을 때나 마실 과실주를 차릴 때에 제사장은 자신의 손을 뻗어 방과 과실주에다 축도를

한다. 그리고 열명이 모인 곳에서 결코 한 사람이 빠져서는 안 되는데 그는 밤낮으로 끊임없이 돌

아가면서 차례로 율법을 연구해야한다.”

 

b. 제의적 서역을 띤 정결목욕

에세네파 사람들은 제의적 성격을 띤 정결목욕을 공동체에 가입한지 적어도 1년 이상 된 사람에 한해서만 허용했다. 그 당시의 유대교 내에서 볼 때 그들의 정결목욕은 세 가지 독 특한 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 정결목욕을 유대인 모두에게 허용하지 않고 엄격한 자신들의 공동체 원들에게만 한정하였다는 점이다. 둘째 더욱 더 엄격한 것은 자신들의 공동체원들 중에서도 적어도 2년 이상의 견습을 받은 뒤에라야 허용하였으며 그들은 어떤 규칙이라도 어겼을 겨우 정결목욕에 참여하는 것을 금했다 셋째로 정결목욕은 토라에 규정되어 있을 경우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모든 식사 참여자들이 정결하다는 것을 보증한다는 의미

애서 공동 식사 전에도 하였다. 이러한 정결목욕은 유독 요세프스의 에세네파에 대한 보도 와 쿰란 문서 안에서만 찾아 볼 수 있지 당시의 유대사회에서는 낯선 것이다.

 

c. 공동체내의 계층 구조

에센파의 각 지역 공동체는 엄격한 계층 구조를 갖고 있는데 공동체의 제 1신분은 제사장 들이고 이어서 레위족 출신 세 번째로 모든 평범한 이스라엘 사람들이며 사막 서열로는 유 대인으로서 개종한 이방인 이들을 프로셀뤼트라고 부른다. 서열 1위에 있는 제사장들이 자연히 다양한 권리를 찾고 있는데 그들은 공동예배며 공동식사를 포함한 모든 모임들의 사회를 맡을 뿐 아니라 토라 로부터 생활 규칙을 유추해내는 권리도 가고 있다. 이러한 계층 구조가 이스라엘 전체와 관련되어 잇지 않고 이스라엘 내에 있는 한 특정 그룹 곧 에세네파 내의 구조 안에서만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 실로 특이한 일이다 이런 계층구조의 측면에서 볼 때 그들이 순종을 강조하였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여겨진다.

 

d. 공동체의 새 가입자와 관련하여

요세프스에 의하면 에센파의 가입은 곧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몇몇 단계들이 있는데 1QS안에서도 이와 상당히 유사한 보도가 나타나고 있다. 공동체의 정회원은 아마도 3-4년 간의 수련기간 뒤에나 가능하였던 것 같다.

 

e.공동소유

필로와 요세프스는 에센파 사람들이 모든 것을 공유하고 어떠한 사유재산도 갖고 있지 않은 것을 두 사람 다 한결같이 칭찬하였다 당시 유대교 내의 어떠한 그룹도 이렇게 에세네파처럼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유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1QS보도가 가운데 잘 나타나 있다. 뿐만 아니라 사유재산 소유 조항과 관련하여 자신의 소유에 대하여 의도적으로 거짓 을 말하면 공동식사에 1년간 제외되며 식사배급량도 4분의 1이나 가량 되는 처벌을 받는다는 사항도 찾아 볼 수 있다. 위에 열거한 사항을 볼 때 쿰란 공동체와 에센파가 같은 무리에 속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대다수의 쿰란연구가들이 이를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쿰란 공동체는 홀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종파로 구성된 고대 유대교라는 복합체에 속하고 있었다.

 

3. 쿰란공동체의 자기이해

쿰란 공동체의 종말론은 구약예언서의 인용방식과 메시아사상 성령이해 등에서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쿰란 공동체는 의의교사 가 중심이 되어 조직되어 있었고 또 그들의 독특한 삶의 정황을 통해 그들은 예루살렘 성소를 떠나 구약예언서 이사야 예언서가 예언했다고 여기는 광야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면서 율법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들은 스스로를 종말론적인 구원공동체라고 여겼다.

 

4. 의의 교사

쿰란공동체는 에세네파에 속한 사람들로서 고대 유대교에 있어서 독특한 위치를 자랑한다. 강한 종말론적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그들은 현재작인 성령체험에 대해서도 언급하였을 뿐 아니라 성서에 나오는 예언이 자기들을 향한 것이며 자신의 시대에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었다. 쿰란 공동체는 초창기 그리스도인들이 가졌던 사고 및 신념과 유사한 것을 소지하고 있는데 이 독특한 공동체가 저절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 한 뛰어난 인물이 서 있었다. 그는 쿰란공동체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이 공동체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던 사람이었다. 그의 성서 해석과 가르침은 그가 죽은 뒤에도 그치지 않고 유감스럽게도 전해 내려오지 않으나 쿰란 공동체가 남긴 문헌 가운데 그를 가리키는 한 칭호가 있으니 바로 의의 교사이다. 의의 교사라는 칭호는 본래 구약성서에서 유래한 말이다 요엘2:23 호세아10:12 쿰란문서를 통하여 의의 교사가 갖고 있던 독특한 자의식을 찾을 수 있다.

첫째는 진리의 .공동체인 에세네파의 설립자로서 자의식인데 그것은 첫 번째 쿰란에서 발견된 호다욧(1QH)이라고 불리는 문서이다. 이 문서는 에세네파 사람들이 구약성서의 시편을 본 따 지은 찬송시 모음집으로 그 가운데 일부는 의의 교사 자신의 작품이다. 의의 교사의 작품으로 간주되는 한 찬송시 가운데 일부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당신은 찬송 하옵나니 주여 왜냐하면 당신은 나를 메마른 땅위를 흐르는 샘으로 만드셨으니 건조 !

한 땅위의 샘물로 또한 정원의 관개용수로 그들이 그 뿌리를 물가로 가지 뻗지 못할 지라도 그 ....

러나 그 성스러운 싹은 잎을 내어 진리의 나무로 자라게 하네 감추고 관심도 끌지 못하며 알려지 .

지도 않은 채 그의 영원한 비밀로 남네.(1QH Ⅷ, 4,10)

 

의의 교사는 자기를 메마르지 않는 샘 생명수의 원천으로 세우셨음에 대하여 감사의 찬송 을 하고 있다 의의 교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가르침으로 인하여 그의 공동체 곧 에센파 가 작은 싹에서 시작하여 커다란 진리의 나무로 성장하리라고 말한다. 의의 교사가 죽은 뒤 에 오나성된 다메섹 문서 가운데서 쿰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의의 교사를 세우셨으니 그들을 그의 마음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함이니 이다(CD Ⅰ,11)라고 언급함으로써 의의 교사가 자신들의 영적인 지도자임을 고백했다. 두 번째 계시의 중개자이며 성서해석의 전권을 가진 자였다. 세 번째 의의 교사를 통하여 선과 악을 분리하는 구원사적인 기능을 자신의 역할에 확신했다. 이상에서 쿰란공동체의 설립자요 최고 지도자인 의의 교사가 갖고 있던 자의식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당시 적법한 대제사장직에서 쫓겨난 의의 교사는 종말의 공동체요 진리의 공동체로서 온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에세네파를 세웠다는 자의식을 갖고 있었다 의의 교사는 자기가 내리는 모든 결정과 행위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허심을 받은 것이라고 확신을 갖고 있었으며 한걸음 나아가 선과 악의 구별이 자신의 가르침에 전적으로 달려있다는 참으로 놀라운 자의식을 지녔던 사람이었다. 의의 교사는 죽은 뒤에도 쿰란공동체의 멤버들에 의해서 유일한 적법한 대제사장이며 공동체 유일한 지도자로서 간주되었던 것이다. 이 엄청난 자의식을 갖고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의의 교사와 필적 할만 한 사람은 아마도 고대 유대교에서 찾아 볼 수없다고 생각 된다. 의의 교사는 고대 유대교 가운데 우리에게 알려진 가장 위대한 종교인이었다고 말 할 수 있다.

 

Ⅴ. 결론

20세기 신학계와 종교계 최고의 발견으로 간주되는 쿰란 사본(사해사본)의 발견은 고대 유대교 연구를 위한 획기적인 사건이었으며 이와 더불어 구약성서 본문 연구에 커다란 전기

를 가져다주었다. 이제까지 알려져 잇던 구약성서에 관한 가장 오래된 사본은 AD895년에 예언서를 필사한 카이로 사본과 A.D.925년경에 마무리된 알레폰 사본이 고작이나 쿰란의 구약성서사본은 B.C.2 세기를 전후로 생성된 사본이기 때문이다. 쿰란에서 구약성서 본문이 발견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사용하는 현대어 구약성서 번역이 토대로 삼은 본문보다 거의천년이나 앞서 기록된 성서 본문을 오늘날 우리가 소장하게 된 점에서 그 발견의 의의가 있

다. 따라서 쿰란의 구약성서 본문은 특별히 구약성서 본문의 변천사적인 측면과 관련하여 놀라운 기여를 하고 있다. 또한 이 문서의 소장을 간주되는 에세네파에 속하는 쿰란사람들 은 성서 연구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처럼 성서 연구에 뜨거운 관심을 보인 것은 성서 가운데 예언된 것이 지금 자기들의 시대를 성취되고 있다고 믿은 종말론적인 성서 이 해 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히브리어 성서의 선지자들이 선포한 예언이 바로 자신들의 실존에 관련된 것으로 믿었다. 다시 말하면 쿰란 공동체가 실재하는 시간이 바로 구약 에서 예언된 종말의 시간이라고 믿었다 이것은 구약의 예언이 바로 자신들의 시간에 성취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우리가 묵시문서를 이해함에 있어서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 한 계시가 아니라 당시 성서가 기록될 때의 공동체가 직면한 상황과 그들의 자기 정체성을이해한다면 미래에 일어날 일을 계시하고 있다는 오류를 범하지는 않을 것이다.

쿰란에서 발견된 많은 문서들은 성서학자들을 흥분하게 했고 특히 신약 학자들에게 고대 유대교의 신학을 할 수 있는 많은 정보를 갖게 되었다 쿰란 문헌이 발견되기 까지 구약외 경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단조로움이 있었으나 쿰란 문헌의 발견으로 얻은 폭넓은 자료를 통해 고대 유대교의 이해와 신약성경 이해의 폭도 넓어졌다 쿰란 문헌이 발견되자 많은 학 자들은 쿰란 문헌의 신학을 신약성경의 내용과 섣불리 동일시하기도 하고 또는 쿰란사람들

을 기독교인과 동일시하기도 하고 신약성경과 전혀 다른 내용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쿰란 문헌 발견 초기 당시 쿰란공동체를 유대교의 아주 작은 종파로 생각하여 문헌을 무시하기도

했으나 지금에 와서 구약과 신약의 중간을 이어주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문헌으로 많은 학자들이 동감한다. 쿰란 공동체는 자신을 신약이 종말론적인 사고를 하는 종말론적 공동체로 이해했다. 성령강림 신약성경기자가 사용하는 구약 인용 그리고 메시야 사상이 신약시대 교회만 가졌던 것이 아니라 비록 신약 성경의 내용과 차이점은 있지만 쿰란공동체역시 가지고 있다. 신약성경의 종말론이 구약과 중간기를 거쳐서 만들어진 역사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라면 쿰란 문헌에서 보여주고 있는 종말론을 이해하는 것이 신약성경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하다.

 

여리고를 순례하고 남쪽으로 사해바다를 향해서 내려오면 사해바다 서쪽에 에세네파의 거주지였던 쿰란이 나옵니 다. 에세네파는 금욕적인 신앙공동체로서 부패한 세상이 싫어서 도시를 떠나 뜨거운 사막에서 개인 재산과 모든 것을 내어 놓고 공동생활을 시작하면서 기도와 명상 빈곤과 자비의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쿰란에 정착 한 것은 BC 1세기 이었습니다 AD68년 예루살렘에 유대인 폭동을 진압하러 가던 티투스 장군이 이들을 학살할 때 이들은 진귀한 성경이 썩지 않도록 옹기 속에 넣어서 동굴에 숨기고 도망을 간 이래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이 성경이 사막의 동굴 속에서 2000년가량을 지낸 셈이죠. 쿰란의 에세네파들이 살던 거주지는 1951년에서 1956년 상에 발굴되었는데 그들이 사용하던 그릇이 부엌에서 발견되었으며 세례식을거행하던 물을 담던 깊은 방도 보입니다. 거주지 동편에는 1100개의 무덤이 잇는 공동묘지도 있습니다. 신기하지 않으세요. 오랫동안 쿰란의 동굴 안에 잠자고 있던 성경 사본들 역사의 흐름 가운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간섭 말입니다. 쿰란 공동체가 형성되지 않고 이곳에서 성경이 기록되지 않았다면 기록되었더라도 이런 천예의 장소가 아니었다면 불태워졌거나썩

어 없어졌겠죠. 아니 그때 그 양치기가 돌을 던지지 않았다면요 . .....”

 

쿰란을 향하는 차 안에서 쿰란유적을 소개해주는 히브리 신학대학에서 공부하는 가이드의 목소리에 어느 때보다 경의로 움이 담겨져 있었다. 쿰란을 방문하고 쿰란에 관한 자료를 모 으면서 그분의 말들이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 왔다. 또한 이스라엘 국립박물관을 방문한 날 쿰란에서 발견된 사해 사본이 담겨 있던 항아리 뚜껑을 상징한다는 성서전당 지붕 앞에서 성지순례의 여러 가지 의미들을 생각해 보았다. 새삼 학교에서 배웠던 지식의 일부분을 너 무나 확연하게 인정하게 되었다. 성서란 해석을 동반하지 않고서는 바로 이해 할 수 없는데 1890년부터 성서고고학이 과학적 학문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이래로 이 분야의 연구가 활발 하게 진행된 결과 성서를 새로운 빛에서 이래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 성서고고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W. F. Albright는 성서고고학이란 고고학적 연구로 조명된 성서학이다라고 했는데 이 말은 성서고고학이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서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고 탐구하는 성서 연구의 한 분야라는 의미이다 성서고고학의 목적이 성서의 기록들을 단순히 고고학적으로 증명 하려는 것만은 아니다 성서의 많은 기록들이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증명된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것 외에도 성서가 쓰이진 세계를 밝힘으로써 성서에 기록된 말씀을 기록된 당시의 역사적 맥락 안에서 좀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한 목적도 가지고 있다. 구약과 신약에 기록된 역사는 진공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폭 넓은 고대 근동 세계의 역사 및 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전개되어 왔다 따라서 고대 근동세계 전체가 성서고고학의 연구 대상이다. 그러나 성서고고학 연구의 초점이 되는 지역은 성지 이스라엘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땅 팔레스틴 은 성서에 기록된 역사가 전개되는 무대이며 현장이기 때문이다.

쿰란의 역사적 배경이 되는 신구약의 중간기는 하나님의 나 무관심한 버려진 시간이 아니었음을 그곳에서 깨달았다.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고 있었다 성지 순례의 거 의 후반부에 쿰란을 방문하고 돌아와 깨달은 것들이 매우 많았지만 이번 보고서를 통하여 그 개관적인 것들과 쿰란에 관련하여 사해사본과 그 배경 역사가 되는 신구약 중간사를 잠시라도 살펴 볼 수 있었던 것이 개인적으로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신구약의 역사는 별개 의 것이 아니다. 역사는 진공 상태에서 이루어진 적이 한번도 없다.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이 현대에 전해지도록 400년의 암흑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것은 결코 암흑 기가 아니었다.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침묵은 부재가 아니라 임재 가운데 침묵이시며 하나 님의 말씀은 구약에도 암흑기에도 신약에도 그리고 오늘날에도 살아있다.

 

참고문헌

신약성서배경사 에두아르트 로제, 대한기독교 출판사, 1995

구약성서의 이해Ⅲ, BW 앤더슨, 이성배 옮김, 서인석 감수, 성바오로출판사, 1984

성서의 역사와 지리, 김흔중, 엘맨, 2003

쿰란문서와 유대교, 김창선, 한국성서연구소, 2002

구약성서개론, 강사문등, 한국장로교출판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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