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전쟁 [ war of Marathon , -戰爭 ]
BC 490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Darius) 왕은 사자(使者)를 그리스에 보내어 항복하도록 권고하였으나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이를 거부하였을 뿐 아니라 사자를 우물 속에 잡아 넣음으로써 선전(宣戰)의 뜻을 분명히 하였다. 다리우스 왕은 이에 크게 노하여 다티스(Datis) 장군과 왕의 조카 아르타페르네스(Artaphernes)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전함 600척, 보병 10만 명 및 기병 1만 명을 그리스 본토 아티카(Attica) 주의 동쪽 해안에 상륙시켜 마라톤 평야에 포진하였다. 마라톤 평야는 아티카의 동해안에 있으며 수도 아테네에서 동북으로 42.195㎞ 떨어져 있는데 동쪽은 바다에 면하고 있으나 다른 3면은 산을 등지고 있고 넓이는 사방 1~2mi즘 되어 지세가 좁아 대군을 움직이기에는 불리하였지만 페르시아 대군은 여기에 진을 쳤으며, 그 위세는 아티카 주를 제압하는 듯하였다. 페르시아 대군이 침입하였다는 소식이 아테네에 전해지자, 올림피아 경기의 경주 선수였던 페이디피데스(Pheidippides)를 스파르타에 사자로 보내 힘을 합쳐 페르시아 군을 물리치자고 요청했다. 이때 페이디피데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 약 150mi을 36시간 만에 주파하였다고 한다. 원조를 요청받은 스파르타는 종교상의 이유로 보름달이 뜨기 이전의 출전을 거부하였다. 아테네는 단독으로라도 싸우기로 결심, 용감 무쌍한 밀티아데스(Miltiades) 장군 지휘하에 불과 1만의 장갑병으로 마라톤평원에 출병하였다. 밀티아데스 장군은 산골짜기로 페르시아 대군을 유인하여 용전 분투한 끝에 10배가 넘는 적군을 궤멸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싸움에서 아테네의 키리코마스 원수 이하 맹장(猛將)과 병사의 희생은 부지기수였으며 문자 그대로 격전이었다. 이 싸움에서 패배함으로써 페르시아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고, 그리스는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 날 아테네 시민들이 싸움의 결과를 학수고대하고 있을 때 일찍이 스파르타에 사자(使者)로 갔던 페이디피데스가 다시 전승 보고의 사자로서 수도를 향하여 쉬지 않고 42.195㎞를 달려가 많은 시민에게 둘러싸여 ‘우리가 승리하였다’라는 한마디 말을 남기고 과도한 질주로 인해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마라톤 레이스의 전설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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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우스 1세는 그리스로 진군한다. 아테네에서 폭정으로 쫒겨난 히파이스의 안내로 페르시아 군은 마라톤 평원까지 별 방해를 받지 않고 진군에 성공합니다. 아테네는 위협을 느끼고 군사강국 스파르타에 지원을 요청하지만, 스파르타는 아폴론 제사기간에 보름달 뜨기전의 전투를 터부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원을 보내지 못합니다. 아테네는 오직 8,000여명의 군사로 페르시아의 25,000여명의 군대와 맞딱드립니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아테네의 밀티아테스 장군은 공격태세를 취하기로 결정합니다. 당시의 군사배치는 보통 중앙에 주력부대를 배치하고, 날개에는 약한 부대를 배치한 뒤 돌파하는 형태였는데, 밀티아테스 장군은 반대로 날개에 주력부대를 배치하였습니다. 또한 자신들의 지역에서 전투를 했기에, 산악지역에 적합한 밀집대형을 취했습니다. 반면, 페르시아 군대는 평소에 평원을 정복하던대로 궁수의 공격 뒤에 기병이 출동하려고 하였지요. 또 아테네의 병사들에게 이 전투는 조국과 가족의 목숨이 걸린 것이었지만, 페르시아의 다민족 병사들에게는 이기나 마나 별 메리트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팔랑크스(밀집대형)
전쟁이 벌어지자, 믿지 못할 결과가 나왔습니다. 페르시아의 궁수들이 발사한 화살은 모두 밀집한 아테네 병사들의 방패에 막혔고, 산악지방이라 기병들의 활약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중앙을 손쉽게 돌파한 페르시아 군대는 아테네 군대의 날개에 있던 주력부대에 포위당해서 처참히 패퇴하고 말았지요. 페르시아 군은 7,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아테네의 병사는 고작 200명이 전사한 대승리였습니다. 그리고 이 승리를 에우클레스가 42키로를 뛰어 전했다고 하지요. 후대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마라톤을 시작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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